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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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역사
- 2.1. 프로화 이전
- 2.2. 프로화 이후
- 2.2.1. 프로 구단 출범 과정
- 2.2.2. 1982년 시즌
- 2.2.3. 1983년 시즌
- 2.2.4. V1 (1984년 시즌)
- 2.2.5. 1985년 ~ 1991년 시즌
- 2.2.6. V2 (1992년 시즌)
- 2.2.7. 1993년 ~ 1998년 시즌
- 2.2.8. 1999년 시즌
- 2.2.9. 2000년 시즌
- 2.2.10. 2001년 ~ 2007년 시즌 (암흑기)
- 2.2.11. 2008년 시즌
- 2.2.12. 2009년 시즌
- 2.2.13. 2010년 시즌
- 2.2.14. 2011년 시즌
- 2.2.15. 2012년 시즌
- 2.2.16. 2013년 시즌
- 2.2.17. 2014년 시즌
- 2.2.18. 2015년 시즌
- 2.2.19. 2016년 시즌
- 2.2.20. 2017년 시즌
- 2.2.21. 2018년 시즌
- 2.2.22. 2019년 시즌
- 2.2.23. 2020년 시즌
- 3. 역대 성적
- 4. 응원
- 5. 선수단
- 6. 영구 결번
- 7. 기타
- 참조
1. 개요
롯데 자이언츠는 1975년 서울에서 창단된 프로 야구팀으로, 1982년 부산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1984년과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으며, 최동원, 이대호 등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했다. KBO 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 중 하나로, 열정적인 응원 문화와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의 응원가가 유명하다. 1982년부터 사직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11번 최동원과 10번 이대호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지바 롯데 마린스와 자매 구단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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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는 롯데그룹의 창업주로서, 일본에서 롯데를 10대 재벌로 성장시킨 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하여 그룹을 확장했으나, 경영권 분쟁과 여러 논란에 휘말린 기업인이다.
롯데 자이언츠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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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롯데 자이언츠 |
로마자 표기 | Lotte Giants |
고유 이름 | 롯데 자이언츠 |
고유 이름 (언어) | ko |
별칭 | 부산 갈매기 |
창단일 | 1975년 |
연고지 | 부산 |
리그 | KBO 리그 (1982년–현재) |
모기업 | 롯데그룹 |
구단주 | 신동빈 |
사장 | 이강훈 |
감독 | 김태형 |
단장 | 박준혁 |
홈 구장 | 사직야구장 (1986년–현재) 울산문수야구장 (2014년~현재) |
이전 홈 구장 | 구덕야구장 (1982년–1985년) 마산야구장 (1982년–2010년) |
2군 구장 | 상동야구장 (2007년–현재) |
팀 색상 | 파란색 빨간색 |
이전 팀명 | 롯데 자이언트 (프로화 이전)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영구 결번 | |
영구 결번 선수 | 11 10 |
구단 기록 | |
리그 우승 횟수 | 2회 |
리그 우승 연도 | 1984년 후기 |
한국시리즈 우승 횟수 | 2회 |
한국시리즈 우승 연도 | 1984년 1992년 |
한국시리즈 출전 횟수 | 4회 |
한국시리즈 출전 연도 | 1984년 1992년 1995년 1999년 |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 | 5회 |
플레이오프 진출 연도 | 1992년 1995년 1999년 2011년 2012년 |
준플레이오프 진출 횟수 | 9회 |
준플레이오프 진출 연도 | 1991년 1992년 2000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2년 2017년 |
와일드카드 결정전 진출 횟수 | 1회 |
와일드카드 결정전 진출 연도 | 1회 |
기타 정보 | |
아시아 시리즈 출전 횟수 | 1회 |
아시아 시리즈 출전 연도 | 2012 |
수용 인원 (사직야구장) | 22,990명 |
수용 인원 (울산문수야구장) | 12,088명 |
마스코트 | 누리, 아라, 피니, 윈지, 루기 |
회사 정보 | |
회사명 | 주식회사 롯데자이언츠 |
영문 회사명 | Lotte Giants Co. Ltd |
설립일 | 1982년 4월 22일 |
업종 | 서비스업 |
사업 내용 | 프로 야구팀 운영, 흥행 사업, 광고 선전, 홍보 사업 |
자본금 | 301억 원 (2020년) |
매출액 | 334억 4,733만 원 (2020년) |
영업이익 | △108억 5,721만 원 (2020년) |
순이익 | △117억 3,557만 원 (2020년) |
직원 수 | 54명 (2020년) |
주요 주주 | 롯데지주 (95%), 롯데알미늄 (5%) |
2. 역사
1975년 5월 6일 서울에서 창단되어 실업야구연맹에 10번째로 가입한 구단이었다. 미래의 프로야구단을 지향하여 롯데 자이언츠라는 구단명을 사용하였다. (다만, 보도 자료에 따라 구단명이 "롯데 자이언'''트'''"라고 표기된 자료가 혼재한다.) 창단 감독은 김동엽이었다.[15]
1976년 춘계리그에서 5승 1무 3패로 육군팀과 공동 3위를 기록했고, 하계리그에서 7승 1무 1패로 우승, 추계리그에서 5승 2무 2패로 우승하였다.[16] 1977년에는 부산시장기 준우승, 백호기 전국선수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16] 1978년 후기리그 우승, 코리언 시리즈 준우승 (78년부터 코리언 시리즈 제도가 생김)을 기록했고,1979년 코리안 시리즈 우승, 1차리그 준우승, 5차리그 준우승, 서라벌기 준우승을 차지했다.[16] 1981년에는 코리언 시리즈 우승,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기록했다.[16]
롯데 자이언츠는 1975년 5월 6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대한야구협회의 아마추어 야구단으로 창단되었다.[15] 1982년 2월 22일, 자이언츠는 프로팀이 되었고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부산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실업 야구단이던 롯데 자이언츠는 1982년 2월 12일 부산, 경남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단으로 변경했다. 초대 감독은 박영길이었다. 구단주는 애초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창단하고자 했으나 마지못해 부산직할시를 선택했다.[17] 이는 해태 타이거즈를 제외한 전 구단이 서울 연고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결국 롯데를 포함한 전 5개 구단이 희망했던 서울 연고는 MBC 청룡의 몫이 되었다.
프로야구 첫 경기는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로 14-2로 승리했다. 그러나 당해 시즌 승률 .388을 기록하며 6개 팀 중 5위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3]
프로 원년 롯데 자이언츠의 부진은 최동원, 유두열, 심재원 국가대표 주전 3명이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로 롯데 입단을 1년 미루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시, 모처럼 한국이 유치한 1982년의 제27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를 맞아 대표팀 전력 강화를 위한 대한야구협회의 요청으로, 7명의 선수가 프로 전향을 유보하고 실업팀 등에 남았고, 그중 3명이 롯데 소속이었으며 3명 모두 주전이었다. 또한 국가대표 4번 타자였던 김용희가 부상으로 팀을 이탈하였다.
참고로 당시 국가대표 차출을 이유로 프로입단을 연기한 선수는 심재원, 유두열, 최동원, 김재박, 이해창, 임호균 등 6명이었다. 최동원은 당시 소속팀이던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가 프로로 전향하자 다른 실업팀인 '한국전력공사'로 소속을 옮겨두게 되었다.[3]
1983년 시즌에는 최동원, 심재원, 유두열 등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합류했으나 6개 팀 중 6위로 첫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1984년 롯데 자이언츠는 KBO 리그 출범 후 세 번째 시즌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3] 전기리그에서는 6개 팀 중 4위에 머물렀으나, 후기리그에서 8월 11일부터 시작된 홈 5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1위로 올라섰다.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 팀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역투(7전 4선승제 중 5경기 등판 4승 1패)와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으로 시리즈 전적 4승 3패로 우승했다.[3] 최동원은 1984년 시즌 27승, 223탈삼진, 2.4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3] 특히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7경기 중 5경기에 출전하여 4승 1패(1완봉승, 3완투승 및 5이닝 구원 등판 1회)를 기록했고, 10일 동안 40이닝을 던지는 괴력을 발휘했다.[3]
1985년 0.536의 승률로 전체 2위의 성적을 냈지만,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전기/후기 리그는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3] 1986년에는 7개 팀 중 5위를 기록하였으며, 1987년과 1988년에는 7개 팀 중 3위로 상위권을 유지했다.[4] 1980년대는 에이스 최동원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 최동원에게 많은 투구를 강요했고 그로 인해 팀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또 당시에는 관례처럼 반복되었던 연봉 협상에 매달려 시즌 오프 훈련에 전념하지 못하여, 최동원의 기량도 젊은 나이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동원 주도로 전개된 선수회 결성 움직임이 있었다. 선수회는 구단 측의 프로야구 해체 위협에 굴복하여 무산되었지만, 롯데 구단은 선수들에 대한 보복 조치로 에이스 최동원과 중심 타자 김용철(キム・ヨンチョル)을 방출하고, 삼성으로부터 투수 김시진(キム・シジン)과 장효조(チャン・ヒョジョ)를 받는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4] 그러나 이 트레이드를 거부한 최동원은 삼성으로부터 임의탈퇴 상태로 반년을 보냈고, 트레이드에 휘말린 다른 당사자들도 모두 부진에 빠졌다. 전·후기 제가 폐지되고 1시즌제가 된 1989년에는 초반부터 부진하여, 결국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최하위(7위)로 1980년대를 마감했다. 1990년에는 6위를 차지하였다. 1991년에는 4위를 차지하였는데, 이해에 롯데는 1,001,920명의 관중을 동원,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홈경기 100만 관중을 돌파하였다.[19] 롯데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6년 연속 프로야구 관중 동원 1위를 기록하였다.[19]
1992년에 롯데 자이언츠는 정규시즌을 3위로 마쳤다. 준 플레이오프 2차전(對 삼성 라이온즈, 4-0), 플레이오프 5차전(對 해태 타이거즈, 10-4), 한국시리즈 5차전(對 빙그레 이글스, 4-2)을 연속으로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9] 남두오성이라고 불리는 5명의 3할 타자(김민호, 김응국, 이종운, 박정태, 전준호)를 배출했고, 윤학길과 염종석이 각각 17승(윤학길-모두 선발(이강철과 선발승 공동 1위) 염종석-15선발승(장호연과 선발승 공동 3위))을 따내었다.[19] 고졸 신인으로 17승(15선발승)을 따내고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염종석은 신인왕과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19]
롯데 자이언츠는 홈경기 누적 관중 1,209,632명, 평균 관중 19,201명을 기록하여 2년 연속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하였다.[19] 포스트시즌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강호 해태 타이거즈와 빙그레 이글스를 연파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싸움을 벌여 한국 시리즈를 제패한 최초의 팀이 되는 동시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19] 또한 2년 연속 시즌 관중 100만 명을 돌파하는 쾌거를 달성했다.[19]
1993년에는 1992년의 우승을 다시 한번 재현할 것이라는 팬들의 기대가 컸지만, 윤형배와 전준호만이 제 몫을 해냈을 뿐이었다. 5월까지 3할 5푼의 고타율을 기록하던 박정태의 부상이 뼈아팠다. 결국 롯데는 6위라는 미비한 성적을 거두었고, 1994년에도 6위에 그쳤다.[20]
1995년에는 선수들의 군 입대로 전력 손실이 컸다. 김용희 감독은 신인 마해영을 4번 타자로 기용하며 꾸준히 기회를 주었고, 마해영은 그해 18홈런을 기록하며 '마림포'라는 별명을 얻었다. 임수혁도 처음에는 하위 타순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타순이 올라 5번 타자로 자리 잡았다. 그해 롯데는 3위를 기록했고, 당시 규정상 3위와 4위가 3경기 이상 차이가 나면 준플레이오프를 치르지 않아 4위 해태 타이거즈는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플레이오프 상대는 LG 트윈스였다. 롯데는 이상훈, 김기범 등 좋은 선발진과 김재현, 서용빈 등 강타선을 보유한 LG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OB 베어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지만, 권명철, 김상진 등의 투수진과 김상호, 심정수 등의 거포를 앞세운 OB 베어스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해 롯데는 1,180,576명의 홈경기 관중을 기록하며 3회에 걸쳐 100만 관중 달성을 기록했다.
1996년에는 팀 유니폼이 바뀌었지만, 윤학길이 시범경기에 부상을 입어 전력을 이탈하고, 주형광만이 선발 투수로서 제 몫을 다했다. 김응국, 임수혁 등이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지만, 5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이해 롯데는 현대피닉스의 문동환을 받아오기 위해 톱타자 전준호를 보냈다.
1997년에는 '마운드의 황태자'로 불린 윤학길의 퇴조,[20] 군 입대와 의병 제대 후유증으로[21] 훈련이 부족했던 주형광의 부진, 해외 전지훈련 때부터 오른쪽 어깨 부상을 호소하여[22] 전반기 9경기 출장에 그친 대졸 신인 손민한, 팔꿈치 부상 뿐 아니라 프로 적응에 실패한[23] 신인 문동환 등 투수진에 구멍이 뚫리면서 4년생 박지철이 전천후(14승(8구원승) 5패 7세이브)로 등판했고 (팀내 최다 선발승 - 차명주 7선발승) 결국 최하위의 성적을 거두었다.[24]
1998년부터 외국인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기 시작했고, 롯데는 덕 브래디를 영입했지만, 0.258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50경기 정도만 뛰고 방출되었다. 1998년도에는 박정태, 마해영 정도가 버텼고, 투수는 문동환 정도가 버텼는데, 그나마 시즌 전 마무리로 낙점된[24] 박지철이 같은 시기 오른발꿈치가 찢어져 고작 2승(모두 구원)에 그치면서 부진에 빠지자 전천후(12승(7선발승) 5패 6세이브)로 투입(팀내 최다 선발승 - 주형광 10선발승)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최하위를 기록하며 김용희 감독은 경질되었다.
1999년 리그 2위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에 몰렸으나, 5, 6, 7차전을 모두 6-5 한 점 차로 승리하였다.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을 결정지은 7차전은 프로 야구 사상 최고의 명승부 가운데 하나로 회자된다. 이 7차전에서 호세의 방망이 투척 사건으로 인해 경기가 23분간 중단되었지만 임수혁의 극적인 동점 투런 홈런과 김민재의 호수비, 그리고 그 김민재의 역전 적시타로 승리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한화 이글스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기론의 호투 덕분에 1승은 얻었다.[25]
마해영이 .372로 역대 타격 5위의 기록을 세우며 타격왕에 올랐고, 박정태는 31게임 연속 안타의 기록을 수립했다. 스위치 히터 펠릭스 호세가 좌우타석 홈런, 연속게임 만루홈런과 1만번째 홈런의 주인공이 되는 진기록도 보여주었다. 1999년 롯데는 팀평균자책점과 팀타율 모두 1위를 기록하였으며 특히 팀 타율 .291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진기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승하지 못하였다.(역대 7번 중 1999년 롯데를 제외하고 모두 우승)[25]
2000년에는 양대 리그제가 시행되었는데, 롯데 자이언츠는 매직리그 2위였다. 삼성 라이온즈는 드림리그 3위를 기록하였으나 삼성의 승률이 더 높아 양 팀 간 3전 2선승제의 준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렀다. 1차전은 마산에서 최초로 열린 포스트 시즌 홈 경기였다. 결과는 0-2, 4-2, 1-5로 1승 2패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고 최종 순위는 5위였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는 2007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한편 2000년 4월 18일 잠실 LG전 도중 포수 임수혁이 2루 진루후 갑자기 쓰러지며 식물인간 판정을 받아 롯데 구단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임수혁은 이후 10년간의 투병 끝에 2010년 2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 이후 경기장에 의무진이 상주하게 하는 규정이 생겼다.
매직리그 2위를 지켰지만, 드림리그 3위 삼성 라이온즈에 연간 승률에서 뒤쳐져 두 팀은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결국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하며, 이를 마지막으로 2008년까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는 긴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2001년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이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5] 후임으로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면서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적인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백인천은 김주찬에게 홈런 스윙을 가르치고 이대호를 전근대적인 훈련법으로 무릎 부상을 입게 했으며 손민한을 트레이드하려 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일으켜, 7년간 롯데 자이언츠 성적 부진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6] 이후 이대호를 3번이나 트레이드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롯데 자이언츠는 8 - 8 - 8 - 8 - 5 - 7 - 7위를 기록하여 7년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26] 특히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최하위는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27]
이 기간 중 펠릭스 호세는 역대 출루율 1위, 2000년대 조정OPS 1위의 기록을 세웠다.[26] 2005년에는 시즌 초반 5연승과 함께 1위로 출발하였으나 여름 이후부터 하락하여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손민한은 18승,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여 리그 MVP를 수상하였으며, 17선발승으로 1986년 선동열의 종전 정규시즌 MVP 최다 선발승과 타이를 이루었지만,[28] 이후 2006년 류현진(18선발승), 2007년 리오스(22선발승)에 의해[29] 깨졌다. 2006년 시즌 이대호는 1984년 이후 처음으로 타자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였다.
2001년, 팀은 초반부터 최하위에 머물렀다.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끈 김명성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스트레스로 시즌 중반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헤드코치 우용득이 감독 대행을 맡았지만 팀은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2002년에는 감독 대행이었던 우용득을 정식 감독으로 승격시켰지만,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2할대의 저조한 성적으로 62경기 만에 경질되었다. 일본 시절부터 롯데 구단과 인연이 있던 백인천을 감독으로 영입했지만, 정신력을 강조하는 백 감독의 방침은 선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2002년에는 시즌 100패 직전인 97패를 기록할 정도로 부진했다. 다음 시즌도 상황은 변하지 않아 91패로 2년 연속 90패,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결국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동안 시즌 중 감독 교체가 4번, 대행을 포함해 6명의 감독을 임명하는 등의 혼란 속에 4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한때 연간 120만 명이나 모였던 부산 홈구장 팬들도 등을 돌렸고, 1경기당 관중 수가 2000명대 이하로 떨어지며 관중 동원은 전성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팀은, 꼼꼼한 분석가로 알려진 구단 OB 양상문(楊相汶, 양상문한국어)에게 2004년부터 지휘를 맡겼다. 2004년에도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2005년에는 최하위를 벗어나 5위로 올라섰다. 팀은 여름까지 포스트시즌 진출을 다툴 정도로 선전했고, 팀을 떠났던 팬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해의 선전에 흥분한 구단은 그 해를 끝으로 양상문 감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이후 2006년에는 주변의 냉담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팀을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강병철 감독을 복귀시켜 상위 진출을 노렸지만, 결과는 7위에 그쳤다.
2007년에는 초반 선전으로 부산을 비롯한 전국적인 야구 인기 부활의 선봉장이 되었지만, 중반 이후 주춤하며 전년도와 같은 7위에 머물렀다. 결국, 팀 역사상 유일한 우승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의 세 번째 지휘는 2년 만에 막을 내렸다.
미국 메이저 리그 선수 출신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2008년 롯데 자이언츠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였다. 9월 2일에는 팀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인 11연승을 기록하였다. (기간 : 2008년 7월 27일 사직 한화전 ~ 2008년 9월 2일 사직 LG전) 이 여세를 몰아 2008년 9월 16일에는 2000년 이후 8년만에 준 플레이오프행을 확정지었다.[30]
이를 보답이라도 하듯 부산과 마산 홈 경기에는 무려 22차례나 입장권이 매진되었고, 전국의 야구장마다 롯데 팬들이 모여들며 응원을 펼쳤다. 그리고 그해 9월 홈 마지막 경기인 KIA전을 앞두고 식전 행사에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4강에 가면 "부산 갈매기"를 부르겠다는 약속에 따라 허남식 부산광역시장과 함께 부산갈매기를 부르며 성원에 보답하였다. 아울러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이날 명예 부산 시민증을 받았다. 그러나 팀은 포스트 시즌 경험이 부족한 탓에, 준 플레이오프 상대인 삼성 라이온즈에게 스윕당하면서 플레이오프행이 좌절되었다.
2008년부터는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감독 경험이 있는 제리 로이스터(Jerry Royster)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외국인 정식 감독[14]으로 새 감독에 취임하여 정규 시즌을 3위로 마치고 8년 만에 염원하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 직전에는 전년도보다 전력이 떨어졌다고 평가받았던 정규시즌 4위 삼성보다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의 저력을 가진 삼성에 3연패로 완패했다. 특히, 자신 있었던 선발진이 무너진 데다 득점권에서의 부진이 눈에 띄었다.
6월 초까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는 극적인 상승세를 타면서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그 후 5전 3선승제의 준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첫 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듯 하였으나 이후 3연패하여 실패하고, 최종 순위 4위로 기록되었다. 특히 주전선수들과 초반 선발투수들의 잇단 부상들이 6월초까지의 최하위의 원인이었다. 2009년에는 정규 시즌 4위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여 준플레이오프에 출전했지만, 두산 베어스에 패했다.
타격에서 다른 팀을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여 롯데 타자를 만나면 몇 명 타자를 제외하고 투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할 정도로 타격에서는 준수했다. 프로야구 최초로 이대호 선수는 도루를 제외한 타격 모든 부분(타격, 득점, 최다안타, 홈런, 타점, 출루율, 장타율) 1위를 달성하고 9경기 연속홈런 세계신기록(8월 4일 ~ 8월 14일)을 달성하였다. 불펜 투수진이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타선 덕분에 4위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였다.
그 후 5전 3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준플레이오프 2차전을 두산을 상대로 2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는 듯 하였으나 믿었던 타선들이 모두 타석에서 침묵을 지키며 3연패, 역스윕을 당하여 또다시 2008, 2009년 시즌과 같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많은 팬들의 재계약 지지 운동에도 불구하고 재계약하지 못하였고, 후임 감독으로 고려대학교 감독이던 양승호 감독이 선임되었다.
제리 로이스터를 이어 롯데를 맡은 양승호 감독은 시즌 전반기에 여러 가지 변화를 주었다. 그는 지명타자 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기 위해 홍성흔을 좌익수로, 불펜진 강화를 위해 고원준을 마무리 투수로 기용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손아섭, 김주찬 등의 부상과 용병 투수 브라이언 코리의 퇴출 등으로 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시즌 후반기에 부상 선수들이 돌아오고 홍성흔도 제자리를 찾으면서 팀 타격이 살아나 시즌 팀 타율 1위를 차지했다.고원준도 불펜 혹사 논란 끝에 선발 투수로 복귀했다. 특히 전반기에 부진했던 불펜진이 살아났는데, 그중에서 임경완, 강영식, 김사율이 경기 후반부를 잘 마무리했고 김사율은 모처럼 20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조원우 외야 수비코치의 지도로 김주찬, 손아섭의 외야 수비가 많이 향상되어 수비가 안정화된 것도 후반기 상승세의 한 요인이었다.
롯데는 창단 후 처음으로 정규 리그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에게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KBO 대회 요강 3조 1항(한국시리즈 우승 구단이 제1위, 준우승 구단이 제2위, 그 이하는 페넌트레이스 승률 순으로 한다)에 따라 최종 순위는 3위가 되었다.
2010년은 2년 연속 정규시즌 4위를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 지었으나, 두산과의 시리즈에서 1, 2차전을 승리한 후 3차전부터 3연패를 당하며 3년 연속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또한 이 해를 끝으로 로이스터 감독이 사퇴하고 양승호 감독이 취임했다. 2011년은 8개 구단 1리그 체제가 된 1991년 이후(2리그 체제였던 1999~2000년 제외) 최고 성적인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 연속 출전을 4년 연속으로 늘렸고, 1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승 3패로 SK 와이번스에 패하며 4년 연속 포스트시즌 다음 단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2011년 시즌 종료 후, 롯데는 4명의 주축 선수가 팀을 떠났다. 자유 계약 신분을 획득한 간판 1루수 이대호와 사이드암 투수 임경완이 롯데를 떠났다. 이대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일본 프로 야구 팀 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하여 그 해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임경완은 FA 협상이 결렬된 뒤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또한 좌완 에이스 장원준과 백업 포수 장성우가 경찰청에 입대하며 전력에서 이탈했다.
SK 와이번스에서 좌완 투수 이승호와 메이저 리그 진출을 준비하다 메디컬 테스트 문제로 돌아온 우완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을 영입해 임경완이 떠난 대신 투수진을 크게 보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호는 잔부상과 겨울훈련 부족으로 인한 구위 부진으로 제 몫을 하지 못했고, 시즌 후 보호선수 제외 및 NC 다이노스의 전력보강 선수로 지명되어 팀을 떠났다. 정대현은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인해 8월에서야 복귀하였다.
'미완의 대기'로 불렸던 강속구 중간계투 투수 최대성이 공익근무 소집 해제로 복귀했으며,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두산 베어스에서 사이드암 투수 김성배가 새로 영입됐다.
외국인 용병으로는 라이언 사도스키가 2010년부터 세 시즌 연속 롯데 유니폼을 입었고, 장원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좌완 투수 셰인 유먼을 영입했다. 유먼은 전 롯데 선수였던 브라이언 코리와 2011년 대만 프로 야구 라미고 몽키스에서 뛴 경험이 있으며, 코리로부터 롯데와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유먼은 롯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으며 장원준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우는데 성공하여 시즌 후 재계약에 성공했다.
시즌 초반 롯데는 셰인 유먼, 이용훈,
2. 1. 프로화 이전
1975년 5월 6일 서울에서 창단되어 실업야구연맹에 10번째로 가입한 구단이었다. 미래의 프로야구단을 지향하여 롯데 자이언츠라는 구단명을 사용하였다. (다만, 보도 자료에 따라 구단명이 "롯데 자이언'''트'''"라고 표기된 자료가 혼재한다.) 창단 감독은 김동엽이었다.[15]1976년 춘계리그에서 5승 1무 3패로 육군팀과 공동 3위를 기록했고, 하계리그에서 7승 1무 1패로 우승, 추계리그에서 5승 2무 2패로 우승하였다.[16] 1977년에는 부산시장기 준우승, 백호기 전국선수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16] 1978년 후기리그 우승, 코리언 시리즈 준우승 (78년부터 코리언 시리즈 제도가 생김)을 기록했고,1979년 코리안 시리즈 우승, 1차리그 준우승, 5차리그 준우승, 서라벌기 준우승을 차지했다.[16] 1981년에는 코리언 시리즈 우승,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기록했다.[16]
롯데 자이언츠는 1975년 5월 6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대한야구협회의 아마추어 야구단으로 창단되었다.[15] 1982년 2월 22일, 자이언츠는 프로팀이 되었고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부산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2. 2. 프로화 이후
롯데 자이언츠는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로 KBO 리그에 데뷔했다.[3] 타이거즈를 14-2로 이겼지만, 6개 팀 중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승률 0.388을 기록했다.[3]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최동원, 류두열, 심재원은 1982년 아마추어 야구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자이언츠 입단을 연기했다.[3]1984년, 자이언츠는 KBO 리그 출범 후 세 번째 시즌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3]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3으로 이겼다.[3]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 중 한 명인 최동원이 이끌었는데, 그는 1984년 시즌 27승, 223탈삼진, 2.4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3]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7경기 중 5경기에 출전하여 4승 1패(1완봉승, 3완투승 및 5이닝 구원 등판 1회)를 기록했고, 10일 동안 40이닝을 던졌다.[3] 최동원의 활약은 롯데 자이언츠의 첫 우승을 이끈 핵심적인 요소였다.
자이언츠는 1988년 시즌 후 KBO 리그 역사상 가장 큰 트레이드 중 하나를 성사시켰다.[4] 에이스 투수 최동원과 김용철을 삼성 라이온즈로 보내고, 타자 장효조와 투수 김시진을 받았다.[4]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결과적으로 롯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최동원은 이후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2. 2. 1. 프로 구단 출범 과정
실업 야구단이던 롯데 자이언츠는 1982년 2월 12일 부산, 경남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단으로 변경했다. 초대 감독은 박영길이었다. 구단주는 애초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창단하고자 했으나 마지못해 부산직할시를 선택했다.[17] 이는 해태 타이거즈를 제외한 전 구단이 서울 연고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결국 롯데를 포함한 전 5개 구단이 희망했던 서울 연고는 MBC 청룡의 몫이 되었다.롯데 자이언츠는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로 KBO 리그에 데뷔했다. 타이거즈를 14-2로 이겼지만, 6개 팀 중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승률 0.388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최동원, 류두열, 심재원은 서울에서 열린 1982년 아마추어 야구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자이언츠 입단을 연기했다.
1984년, 자이언츠는 KBO 리그 출범 후 세 번째 시즌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3으로 이겼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 중 한 명인 최동원이 이끌었는데, 그는 1984년 시즌 27승, 223탈삼진, 2.4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3]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7경기 중 5경기에 출전하여 4승 1패(1완봉승, 3완투승 및 5이닝 구원 등판 1회)를 기록했고, 10일 동안 40이닝을 던졌다.[3]
자이언츠는 1988년 시즌 후 KBO 리그 역사상 가장 큰 트레이드 중 하나를 성사시켰다. 에이스 투수 최동원과 김용철을 삼성 라이온즈로 보내고, 타자 장효조와 투수 김시진을 받았다.[4]
2. 2. 2. 1982년 시즌
프로야구 첫 경기는 1982년 3월 28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로 14-2로 승리했다. 그러나 당해 시즌 승률 .388을 기록하며 6개 팀 중 5위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3]프로 원년 롯데 자이언츠의 부진은 최동원, 유두열, 심재원 국가대표 주전 3명이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로 롯데 입단을 1년 미루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시, 모처럼 한국이 유치한 1982년의 제27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를 맞아 대표팀 전력 강화를 위한 대한야구협회의 요청으로, 7명의 선수가 프로 전향을 유보하고 실업팀 등에 남았고, 그중 3명이 롯데 소속이었으며 3명 모두 주전이었다. 또한 국가대표 4번 타자였던 김용희가 부상으로 팀을 이탈하였다.
참고로 당시 국가대표 차출을 이유로 프로입단을 연기한 선수는 심재원, 유두열, 최동원, 김재박, 이해창, 임호균 등 6명이었다. 최동원은 당시 소속팀이던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가 프로로 전향하자 다른 실업팀인 '한국전력공사'로 소속을 옮겨두게 되었다.[3]
2. 2. 3. 1983년 시즌
최동원, 심재원, 유두열 등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합류했으나 6개 팀 중 6위로 첫 최하위를 기록하였다.2. 2. 4. V1 (1984년 시즌)
1984년 롯데 자이언츠는 KBO 리그 출범 후 세 번째 시즌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3] 전기리그에서는 6개 팀 중 4위에 머물렀으나, 후기리그에서 8월 11일부터 시작된 홈 5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1위로 올라섰다.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 팀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역투(7전 4선승제 중 5경기 등판 4승 1패)와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으로 시리즈 전적 4승 3패로 우승했다.[3] 최동원은 1984년 시즌 27승, 223탈삼진, 2.4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3] 특히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7경기 중 5경기에 출전하여 4승 1패(1완봉승, 3완투승 및 5이닝 구원 등판 1회)를 기록했고, 10일 동안 40이닝을 던지는 괴력을 발휘했다.[3]2. 2. 5. 1985년 ~ 1991년 시즌
1985년 0.536의 승률로 전체 2위의 성적을 냈지만,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전기/후기 리그는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3] 1986년에는 7개 팀 중 5위를 기록하였으며, 1987년과 1988년에는 7개 팀 중 3위로 상위권을 유지했다.[4] 1980년대는 에이스 최동원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 최동원에게 많은 투구를 강요했고 그로 인해 팀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또 당시에는 관례처럼 반복되었던 연봉 협상에 매달려 시즌 오프 훈련에 전념하지 못하여, 최동원의 기량도 젊은 나이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동원 주도로 전개된 선수회 결성 움직임이 있었다. 선수회는 구단 측의 프로야구 해체 위협에 굴복하여 무산되었지만, 롯데 구단은 선수들에 대한 보복 조치로 에이스 최동원과 중심 타자 김용철(キム・ヨンチョル)을 방출하고, 삼성으로부터 투수 김시진(キム・シジン)과 장효조(チャン・ヒョジョ)를 받는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4] 그러나 이 트레이드를 거부한 최동원은 삼성으로부터 임의탈퇴 상태로 반년을 보냈고, 트레이드에 휘말린 다른 당사자들도 모두 부진에 빠졌다. 전·후기 제가 폐지되고 1시즌제가 된 1989년에는 초반부터 부진하여, 결국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최하위(7위)로 1980년대를 마감했다. 1990년에는 6위를 차지하였다. 1991년에는 4위를 차지하였는데, 이해에 롯데는 1,001,920명의 관중을 동원,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홈경기 100만 관중을 돌파하였다.[19] 롯데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6년 연속 프로야구 관중 동원 1위를 기록하였다.[19]2. 2. 6. V2 (1992년 시즌)
1992년에 롯데 자이언츠는 정규시즌을 3위로 마쳤다. 준 플레이오프 2차전(對 삼성 라이온즈, 4-0), 플레이오프 5차전(對 해태 타이거즈, 10-4), 한국시리즈 5차전(對 빙그레 이글스, 4-2)을 연속으로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9] 남두오성이라고 불리는 5명의 3할 타자(김민호, 김응국, 이종운, 박정태, 전준호)를 배출했고, 윤학길과 염종석이 각각 17승(윤학길-모두 선발(이강철과 선발승 공동 1위) 염종석-15선발승(장호연과 선발승 공동 3위))을 따내었다.[19] 고졸 신인으로 17승(15선발승)을 따내고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염종석은 신인왕과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19]롯데 자이언츠는 홈경기 누적 관중 1,209,632명, 평균 관중 19,201명을 기록하여 2년 연속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하였다.[19] 포스트시즌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강호 해태 타이거즈와 빙그레 이글스를 연파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싸움을 벌여 한국 시리즈를 제패한 최초의 팀이 되는 동시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19] 또한 2년 연속 시즌 관중 100만 명을 돌파하는 쾌거를 달성했다.[19]
2. 2. 7. 1993년 ~ 1998년 시즌
1993년에는 1992년의 우승을 다시 한번 재현할 것이라는 팬들의 기대가 컸지만, 윤형배와 전준호만이 제 몫을 해냈을 뿐이었다. 5월까지 3할 5푼의 고타율을 기록하던 박정태의 부상이 뼈아팠다. 결국 롯데는 6위라는 미비한 성적을 거두었고, 1994년에도 6위에 그쳤다.[20]1995년에는 선수들의 군 입대로 전력 손실이 컸다. 김용희 감독은 신인 마해영을 4번 타자로 기용하며 꾸준히 기회를 주었고, 마해영은 그해 18홈런을 기록하며 '마림포'라는 별명을 얻었다. 임수혁도 처음에는 하위 타순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타순이 올라 5번 타자로 자리 잡았다. 그해 롯데는 3위를 기록했고, 당시 규정상 3위와 4위가 3경기 이상 차이가 나면 준플레이오프를 치르지 않아 4위 해태 타이거즈는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플레이오프 상대는 LG 트윈스였다. 롯데는 이상훈, 김기범 등 좋은 선발진과 김재현, 서용빈 등 강타선을 보유한 LG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OB 베어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지만, 권명철, 김상진 등의 투수진과 김상호, 심정수 등의 거포를 앞세운 OB 베어스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해 롯데는 1,180,576명의 홈경기 관중을 기록하며 3회에 걸쳐 100만 관중 달성을 기록했다.
1996년에는 팀 유니폼이 바뀌었지만, 윤학길이 시범경기에 부상을 입어 전력을 이탈하고, 주형광만이 선발 투수로서 제 몫을 다했다. 김응국, 임수혁 등이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지만, 5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이해 롯데는 현대피닉스의 문동환을 받아오기 위해 톱타자 전준호를 보냈다.
1997년에는 '마운드의 황태자'로 불린 윤학길의 퇴조,[20] 군 입대와 의병 제대 후유증으로[21] 훈련이 부족했던 주형광의 부진, 해외 전지훈련 때부터 오른쪽 어깨 부상을 호소하여[22] 전반기 9경기 출장에 그친 대졸 신인 손민한, 팔꿈치 부상 뿐 아니라 프로 적응에 실패한[23] 신인 문동환 등 투수진에 구멍이 뚫리면서 4년생 박지철이 전천후(14승(8구원승) 5패 7세이브)로 등판했고 (팀내 최다 선발승 - 차명주 7선발승) 결국 최하위의 성적을 거두었다.[24]
1998년부터 외국인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기 시작했고, 롯데는 덕 브래디를 영입했지만, 0.258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50경기 정도만 뛰고 방출되었다. 1998년도에는 박정태, 마해영 정도가 버텼고, 투수는 문동환 정도가 버텼는데, 그나마 시즌 전 마무리로 낙점된[24] 박지철이 같은 시기 오른발꿈치가 찢어져 고작 2승(모두 구원)에 그치면서 부진에 빠지자 전천후(12승(7선발승) 5패 6세이브)로 투입(팀내 최다 선발승 - 주형광 10선발승)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최하위를 기록하며 김용희 감독은 경질되었다.
2. 2. 8. 1999년 시즌
1999년 리그 2위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에 몰렸으나, 5, 6, 7차전을 모두 6-5 한 점 차로 승리하였다.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을 결정지은 7차전은 프로 야구 사상 최고의 명승부 가운데 하나로 회자된다. 이 7차전에서 호세의 방망이 투척 사건으로 인해 경기가 23분간 중단되었지만 임수혁의 극적인 동점 투런 홈런과 김민재의 호수비, 그리고 그 김민재의 역전 적시타로 승리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한화 이글스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기론의 호투 덕분에 1승은 얻었다.[25]마해영이 .372로 역대 타격 5위의 기록을 세우며 타격왕에 올랐고, 박정태는 31게임 연속 안타의 기록을 수립했다. 스위치 히터 펠릭스 호세가 좌우타석 홈런, 연속게임 만루홈런과 1만번째 홈런의 주인공이 되는 진기록도 보여주었다. 1999년 롯데는 팀평균자책점과 팀타율 모두 1위를 기록하였으며 특히 팀 타율 .291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진기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승하지 못하였다.(역대 7번 중 1999년 롯데를 제외하고 모두 우승)[25]
2. 2. 9. 2000년 시즌
2000년에는 양대 리그제가 시행되었는데, 롯데 자이언츠는 매직리그 2위였다. 삼성 라이온즈는 드림리그 3위를 기록하였으나 삼성의 승률이 더 높아 양 팀 간 3전 2선승제의 준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렀다. 1차전은 마산에서 최초로 열린 포스트 시즌 홈 경기였다. 결과는 0-2, 4-2, 1-5로 1승 2패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고 최종 순위는 5위였다.이후 롯데 자이언츠는 2007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한편 2000년 4월 18일 잠실 LG전 도중 포수 임수혁이 2루 진루후 갑자기 쓰러지며 식물인간 판정을 받아 롯데 구단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임수혁은 이후 10년간의 투병 끝에 2010년 2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 이후 경기장에 의무진이 상주하게 하는 규정이 생겼다.
매직리그 2위를 지켰지만, 드림리그 3위 삼성 라이온즈에 연간 승률에서 뒤쳐져 두 팀은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결국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하며, 이를 마지막으로 2008년까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는 긴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2. 2. 10. 2001년 ~ 2007년 시즌 (암흑기)
2001년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이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5] 후임으로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면서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적인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백인천은 김주찬에게 홈런 스윙을 가르치고 이대호를 전근대적인 훈련법으로 무릎 부상을 입게 했으며 손민한을 트레이드하려 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일으켜, 7년간 롯데 자이언츠 성적 부진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6] 이후 이대호를 3번이나 트레이드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2001년부터 2007년까지 롯데 자이언츠는 8 - 8 - 8 - 8 - 5 - 7 - 7위를 기록하여 7년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26] 특히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최하위는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27]
이 기간 중 펠릭스 호세는 역대 출루율 1위, 2000년대 조정OPS 1위의 기록을 세웠다.[26] 2005년에는 시즌 초반 5연승과 함께 1위로 출발하였으나 여름 이후부터 하락하여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손민한은 18승,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여 리그 MVP를 수상하였으며, 17선발승으로 1986년 선동열의 종전 정규시즌 MVP 최다 선발승과 타이를 이루었지만,[28] 이후 2006년 류현진(18선발승), 2007년 리오스(22선발승)에 의해[29] 깨졌다. 2006년 시즌 이대호는 1984년 이후 처음으로 타자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였다.
2001년, 팀은 초반부터 최하위에 머물렀다.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끈 김명성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스트레스로 시즌 중반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헤드코치 우용득이 감독 대행을 맡았지만 팀은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2002년에는 감독 대행이었던 우용득을 정식 감독으로 승격시켰지만,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2할대의 저조한 성적으로 62경기 만에 경질되었다. 일본 시절부터 롯데 구단과 인연이 있던 백인천을 감독으로 영입했지만, 정신력을 강조하는 백 감독의 방침은 선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2002년에는 시즌 100패 직전인 97패를 기록할 정도로 부진했다. 다음 시즌도 상황은 변하지 않아 91패로 2년 연속 90패,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결국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동안 시즌 중 감독 교체가 4번, 대행을 포함해 6명의 감독을 임명하는 등의 혼란 속에 4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한때 연간 120만 명이나 모였던 부산 홈구장 팬들도 등을 돌렸고, 1경기당 관중 수가 2000명대 이하로 떨어지며 관중 동원은 전성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팀은, 꼼꼼한 분석가로 알려진 구단 OB 양상문(楊相汶, 양상문한국어)에게 2004년부터 지휘를 맡겼다. 2004년에도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2005년에는 최하위를 벗어나 5위로 올라섰다. 팀은 여름까지 포스트시즌 진출을 다툴 정도로 선전했고, 팀을 떠났던 팬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해의 선전에 흥분한 구단은 그 해를 끝으로 양상문 감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이후 2006년에는 주변의 냉담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팀을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강병철 감독을 복귀시켜 상위 진출을 노렸지만, 결과는 7위에 그쳤다.
2007년에는 초반 선전으로 부산을 비롯한 전국적인 야구 인기 부활의 선봉장이 되었지만, 중반 이후 주춤하며 전년도와 같은 7위에 머물렀다. 결국, 팀 역사상 유일한 우승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의 세 번째 지휘는 2년 만에 막을 내렸다.
2. 2. 11. 2008년 시즌
미국 메이저 리그 선수 출신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2008년 롯데 자이언츠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였다. 9월 2일에는 팀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인 11연승을 기록하였다. (기간 : 2008년 7월 27일 사직 한화전 ~ 2008년 9월 2일 사직 LG전) 이 여세를 몰아 2008년 9월 16일에는 2000년 이후 8년만에 준 플레이오프행을 확정지었다.[30]이를 보답이라도 하듯 부산과 마산 홈 경기에는 무려 22차례나 입장권이 매진되었고, 전국의 야구장마다 롯데 팬들이 모여들며 응원을 펼쳤다. 그리고 그해 9월 홈 마지막 경기인 KIA전을 앞두고 식전 행사에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4강에 가면 "부산 갈매기"를 부르겠다는 약속에 따라 허남식 부산광역시장과 함께 부산갈매기를 부르며 성원에 보답하였다. 아울러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이날 명예 부산 시민증을 받았다. 그러나 팀은 포스트 시즌 경험이 부족한 탓에, 준 플레이오프 상대인 삼성 라이온즈에게 스윕당하면서 플레이오프행이 좌절되었다.
2008년부터는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감독 경험이 있는 제리 로이스터(Jerry Royster)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외국인 정식 감독[14]으로 새 감독에 취임하여 정규 시즌을 3위로 마치고 8년 만에 염원하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준플레이오프 직전에는 전년도보다 전력이 떨어졌다고 평가받았던 정규시즌 4위 삼성보다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의 저력을 가진 삼성에 3연패로 완패했다. 특히, 자신 있었던 선발진이 무너진 데다 득점권에서의 부진이 눈에 띄었다.
2. 2. 12. 2009년 시즌
6월 초까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는 극적인 상승세를 타면서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그 후 5전 3선승제의 준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첫 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듯 하였으나 이후 3연패하여 실패하고, 최종 순위 4위로 기록되었다. 특히 주전선수들과 초반 선발투수들의 잇단 부상들이 6월초까지의 최하위의 원인이었다. 2009년에는 정규 시즌 4위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여 준플레이오프에 출전했지만, 두산 베어스에 패했다.2. 2. 13. 2010년 시즌
타격에서 다른 팀을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여 롯데 타자를 만나면 몇 명 타자를 제외하고 투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할 정도로 타격에서는 준수했다. 프로야구 최초로 이대호 선수는 도루를 제외한 타격 모든 부분(타격, 득점, 최다안타, 홈런, 타점, 출루율, 장타율) 1위를 달성하고 9경기 연속홈런 세계신기록(8월 4일 ~ 8월 14일)을 달성하였다. 불펜 투수진이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타선 덕분에 4위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였다.그 후 5전 3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준플레이오프 2차전을 두산을 상대로 2승을 거두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는 듯 하였으나 믿었던 타선들이 모두 타석에서 침묵을 지키며 3연패, 역스윕을 당하여 또다시 2008, 2009년 시즌과 같이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많은 팬들의 재계약 지지 운동에도 불구하고 재계약하지 못하였고, 후임 감독으로 고려대학교 감독이던 양승호 감독이 선임되었다.
2. 2. 14. 2011년 시즌
제리 로이스터를 이어 롯데를 맡은 양승호 감독은 시즌 전반기에 여러 가지 변화를 주었다. 그는 지명타자 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기 위해 홍성흔을 좌익수로, 불펜진 강화를 위해 고원준을 마무리 투수로 기용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손아섭, 김주찬 등의 부상과 용병 투수 브라이언 코리의 퇴출 등으로 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시즌 후반기에 부상 선수들이 돌아오고 홍성흔도 제자리를 찾으면서 팀 타격이 살아나 시즌 팀 타율 1위를 차지했다.고원준도 불펜 혹사 논란 끝에 선발 투수로 복귀했다. 특히 전반기에 부진했던 불펜진이 살아났는데, 그중에서 임경완, 강영식, 김사율이 경기 후반부를 잘 마무리했고 김사율은 모처럼 20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조원우 외야 수비코치의 지도로 김주찬, 손아섭의 외야 수비가 많이 향상되어 수비가 안정화된 것도 후반기 상승세의 한 요인이었다.롯데는 창단 후 처음으로 정규 리그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에게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KBO 대회 요강 3조 1항(한국시리즈 우승 구단이 제1위, 준우승 구단이 제2위, 그 이하는 페넌트레이스 승률 순으로 한다)에 따라 최종 순위는 3위가 되었다.
2010년은 2년 연속 정규시즌 4위를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 지었으나, 두산과의 시리즈에서 1, 2차전을 승리한 후 3차전부터 3연패를 당하며 3년 연속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또한 이 해를 끝으로 로이스터 감독이 사퇴하고 양승호 감독이 취임했다. 2011년은 8개 구단 1리그 체제가 된 1991년 이후(2리그 체제였던 1999~2000년 제외) 최고 성적인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 연속 출전을 4년 연속으로 늘렸고, 1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승 3패로 SK 와이번스에 패하며 4년 연속 포스트시즌 다음 단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2. 2. 15. 2012년 시즌
2011년 시즌 종료 후, 롯데는 4명의 주축 선수가 팀을 떠났다. 자유 계약 신분을 획득한 간판 1루수 이대호와 사이드암 투수 임경완이 롯데를 떠났다. 이대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일본 프로 야구 팀 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하여 그 해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임경완은 FA 협상이 결렬된 뒤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또한 좌완 에이스 장원준과 백업 포수 장성우가 경찰청에 입대하며 전력에서 이탈했다.SK 와이번스에서 좌완 투수 이승호와 메이저 리그 진출을 준비하다 메디컬 테스트 문제로 돌아온 우완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을 영입해 임경완이 떠난 대신 투수진을 크게 보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호는 잔부상과 겨울훈련 부족으로 인한 구위 부진으로 제 몫을 하지 못했고, 시즌 후 보호선수 제외 및 NC 다이노스의 전력보강 선수로 지명되어 팀을 떠났다. 정대현은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인해 8월에서야 복귀하였다.
'미완의 대기'로 불렸던 강속구 중간계투 투수 최대성이 공익근무 소집 해제로 복귀했으며,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두산 베어스에서 사이드암 투수 김성배가 새로 영입됐다.
외국인 용병으로는 라이언 사도스키가 2010년부터 세 시즌 연속 롯데 유니폼을 입었고, 장원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좌완 투수 셰인 유먼을 영입했다. 유먼은 전 롯데 선수였던 브라이언 코리와 2011년 대만 프로 야구 라미고 몽키스에서 뛴 경험이 있으며, 코리로부터 롯데와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유먼은 롯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으며 장원준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우는데 성공하여 시즌 후 재계약에 성공했다.
시즌 초반 롯데는 셰인 유먼, 이용훈, 김성배, 이명우, 최대성 등 탄탄한 투수진과 짜임새 있는 타선을 앞세워 선두권을 질주했고, 특히 60경기 이상 치른 시점이던 6월에도 단독 선두에 올랐다. 60경기 이상 치른 시점에서 롯데가 중간 순위 1위에 오른 것은 창단 3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롯데는 6월 17일 주전 포수 강민호의 체력 안배를 위해 두산에 신인급 우완 투수 김명성을 내주고 용덕한을 영입했다. 용덕한은 롯데 입단 직후 1군에 즉시 투입되며 강민호와 번갈아 경기에 출장했다.
그러나 롯데는 시즌 내내 잔부상과 부진 때문에 시름을 앓았다. 4번 타자 홍성흔이 각종 잔부상으로 경기를 자주 걸렀고, 주전 유격수 문규현과 톱타자 김주찬도 잔부상에 자주 시달려 박준서, 정훈, 황동채 이승화 등이 번갈아 가며 라인업을 채웠다. 또한 강민호, 전준우, 황재균 등 핵심 타자들의 활약이 2011년보다 부진해지면서 공격력이 약해졌다.
결국 페넌트레이스를 4위로 마감해 2010년 이후 2년 만에 준 플레이오프부터 포스트시즌을 시작했다. 페넌트레이스 개인 타이틀에서는 손아섭이 158개의 안타를 쳐내 최다 안타 타이틀을 획득했고, 마무리 보직을 맡은 주장 김사율은 34세이브를 기록해 롯데 자이언츠 투수 중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다. (종전 기록은 1994년 박동희의 31세이브)
두산 베어스와의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박준서, 용덕한, 문규현 등 그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들이 맹활약하고, 부상에서 회복한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이 호투하면서 3승 1패로 시리즈를 통과한다. 롯데 자이언츠가 준 플레이오프를 통과한 것은 1992년 이후 20년 만이며, 상위 시리즈로 진출한 것은 1999년 이후 13년 만이다.
그러나 SK 와이번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3패로 밀려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 후 양승호 감독이 물러나고 권두조 수석코치가 대행을 맡아 아시아 시리즈를 치른 후 김시진 감독이 새로 취임하였다.
2012년 아시아 시리즈가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려, 개최지 연고 팀 자격으로 아시아 시리즈에 출전하였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밀려 우승에는 실패했다.
2. 2. 16. 2013년 시즌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였던 우완 투수 조정훈과 유격수 박기혁이 공익근무 소집이 해제되어 복귀하였다. FA 협상 결렬로 김주찬과 홍성흔이 떠나게 되자 2013년 드래프트에서 지명하였던 투수 송창현을 한화 이글스의 장성호를 상대로 트레이드하여 보내고 장성호를 영입했다. 그리고 김주찬과 홍성흔의 보상 선수로 홍성민과 김승회를 지명하여 투수진을 보강했다.시즌 시작과 동시에 5연승을 하였으나 주축 타자들(홍성흔, 김주찬)의 이탈로 내리 7연패하며 극심한 타격동반부진이 찾아오기도 했다. 5월에는 주축 선수들(조성환, 박기혁, 장성호)이 부상으로 빠졌으나 2군에서 정훈 신본기 김대우 등의 경험없는 선수들이 활약하며 상승세를 타 4위에 안착하여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했다. 하지만 무리한 투수기용과 과부하로 인하여 올스타 브레이크전 5위로 추락하여 그이후 5위로 마감하였다.
그러나 2012 시즌 중반부터 문제가 되었던 전준우, 황재균, 손아섭 등의 타자들의 메커니즘이 정상 궤도로 안착되었고 팀도 덩달아 상승세를 타며 다음시즌에 희망을 보여주었다.
한국 프로야구가 본격적으로 9개 구단 체제로 확대된 2013년에는 5위에 그치며 2007년 이후 6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총 관중 동원 수도 약 77만 명으로 2012년 대비 44%나 감소했다.
2. 2. 17. 2014년 시즌
2013년 FA 최대어 중 하나였던 강민호를 4년 75억, 불펜 투수 강영식을 4년 17억으로 잔류시켰다. 롯데는 FA로 팀을 떠난 김주찬과 홍성흔의 빈자리를 메꿀 리드오프와 4번타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FA 자격을 얻은 리드오프 중 이용규는 한화, 이대형은 KIA, 이종욱은 NC와 각각 계약했다. 롯데는 두산 베어스|두산의 최준석을 4년 35억에 영입하고, 외국인 선수로 루이스 히메네스를 영입했다. 장원준, 장성우 등 9명이 군에서 복귀하면서 전력이 보강되었다.정규 시즌은 주전 포수 강민호의 부진과 불펜이 무너졌으나 손아섭과 루이스 히메네스, 정훈의 활약과 1, 2, 3선발의 활약, 탄탄한 수비에 힘입어 6월까지 4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루이스 히메네스의 장기 부상, 선발진의 붕괴, 문규현의 부상 등 악재가 겹치며 7월부터 하락, 결국 7위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후 김시진 감독은 사임했다.
2014년 5월 27일, 권두조 수석코치가 원정 경기 당시 숙소 CCTV를 통해 선수들의 출입을 감시한 것을 두고 선수단이 항명하여 사퇴했다. 이후 프런트는 7월 김시진 감독에게 정민태, 박흥식 외 2명의 코치를 2군으로 내리라고 압박하고, 독단적으로 경질하려 했다. 김시진 감독 사퇴 후, 배재후와 이문한을 위시한 프런트가 공필성을 감독에 임명하기로 하자, 선수단은 그가 프런트 라인이라며 반대 성명서를 내고 항명했고, 여론의 포화를 맞은 공필성은 롯데를 떠났다. 이후 롯데는 이종운 코치를 감독으로 승진시켰다.
2. 2. 18. 2015년 시즌
2년 동안 부진한 성적을 거둔 김시진 감독이 물러나고 이종운 감독이 부임했다. 한화 이글스 출신의 레전드 장종훈을 타격코치로, 2012년까지 롯데 자이언츠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하다가 은퇴한 라이언 사도스키를 해외 스카우트 코치로 영입했다. 또 이종운 감독의 요청으로 LG에서 방출된 외야수 임재철을 영입하였다. 임재철은 1999 시즌 롯데 선수 소속으로 한국시리즈를 경험했었다.2015 FA 이적 시장에서 장원준, 김사율, 박기혁이 팀을 떠났고, 롯데는 두산 베어스로 이적한 장원준의 보상선수로 정재훈을 지명했다. 쉐인 유먼, 크리스 옥스프링, 루이스 히메네스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브룩스 레일리, 조쉬 린드블럼, 짐 아두치를 영입했다.
시즌 초반 3위까지 올랐지만 불펜의 난조로 5월 2일 KT 위즈와 4:5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장성우, 최대성, 하준호, 이창진, 윤여운이 KT 위즈로, 박세웅, 이성민, 조현우, 안중열이 롯데로 이적했다. 6월 이후 급격히 추락하여 8월까지 8위에 머물렀다가 9월에 반등하여 5위를 달성, 와일드카드를 거머쥐며 3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기대했으나 시즌 마지막 13경기에서 2승 11패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시즌 후 이종운 감독은 경질되었다.
2015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불펜 평균자책점은 5.43으로 10개 구단 중 최하위였다. 팀 세이브는 19개로 리그 9위, 블론세이브는 18개로 가장 많았다. 불펜이 흔들리자 투수들의 보직변동이 잦아졌고 이는 투수진 전체의 불안요소가 되었다. 결국 불펜 투수들의 집단 난조가 2015 시즌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에 가장 큰 요인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라이언 사도스키 코치가 추천하여 영입한 외국인 용병 3명은 2015 시즌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브룩스 레일리는 11승 9패 ERA 3.91, 조쉬 린드블럼은 13승 11패 ERA 3.56, 짐 아두치는 0.314의 타율에 28홈런 24도루 106타점 105득점으로 팀 최초 20-20 클럽에 가입했다.
2. 2. 19. 2016년 시즌
2015 시즌 10개 팀 중 8위를 기록한 롯데 자이언츠는 이종운 감독을 경질하고 2011 시즌 롯데 자이언츠에서 외야 수비코치를 역임했고 2015 시즌 SK 와이번스에서 수석코치를 지냈던 조원우 감독을 계약기간 2년에 롯데 자이언츠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다.2015 시즌 불펜의 집단방화로 인해 롯데시네마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안게 되었던 롯데는 불펜 보강을 위해 손승락, 윤길현 선수를 각각 60억, 38억에 FA로 영입했다. 그 대신 김승회 선수를 SK 와이번스에 보상선수로 내주었다. (넥센 히어로즈는 손승락의 보상선수 지명을 포기하였다.) 한편, FA를 통해 심수창을 한화 이글스에 내주면서 박한길을 보상선수로 영입하였다.
2016년 6월 1일에 두산 베어스에서 뛰던 노경은을 고원준과의 맞트레이드로 영입하였다.
동년 7월 23일에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영입했던 김성배를 두산 베어스에 다시 내주고 그 대신 김동한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황재균은 이해 팀 두번째로 20-20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2016년은 2년 연속 8위를 기록하며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2. 2. 20. 2017년 시즌
2017년 시즌을 준비하던 중 이대호가 롯데 자이언츠로 복귀하였다.2017년 4월 18일 KT 위즈와 트레이드를 하게 되었다. 내야수 오태곤(개명전 : 오승택)과 투수 배제성을 내어주고 투수 장시환과 김건국을 받게 되었다.
이대호 복귀로 타선이 살아나면서 시즌 초반 상승세를 타다가 5월 들어 투타 밸런스가 깨지며 주춤하기 시작했다.
1위였던 순위는 어느새 7위까지 추락했고 8위 한화 이글스와 경기차가 벌어지지 않아 순위가 더 내려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시즌 초반 수면 장애 증상으로 방출된 파커 마켈을 대신해 영입한 닉 애디튼을 방출하고 작년까지 KBO에서 뛰었던 조쉬 린드블럼을 영입하며 확정적인 선발진을 가지게 되었다.
올스타전을 치른 이후 조금씩 상승세를 타다가 8월부터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냈다.
7위였던 순위는 어느새 4위까지 올라갔고 이대호는 3할-30홈런-100타점, 손아섭은 개인 통산 첫번째 20홈런을 때려내며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선발 박세웅은 10승 고지를 밟았고 9월 이후 브룩스 레일리와 송승준도 따라서 10승을 기록하면서 14년 이후 3년만에 10승 투수 3명을 배출하게 됐다.
2017 정규시즌은 3위, 준플레이오프에서 NC 다이노스에게 패배하며 최종 3위로 마감지었다.
2017년 시즌이 끝난 이후 FA에서 황재균을 KT 위즈로, 강민호를 삼성 라이온즈로 떠나보냈다.
손아섭, 문규현은 롯데에 잔류하게 되었고, 민병헌, 채태인을 영입하였다. 외국인선수는 조쉬 린드블럼이 두산으로 이적하였고,그의 대체선수로 펠릭스 듀브론트가 영입된다.브룩스 레일리와 앤디 번즈는 재계약에 성공하였다.
2. 2. 21. 2018년 시즌
2018년 3월 5일을 기해 새로운 구단 엠블럼으로 전면 교체를 했다. 2003년부터 14년 동안 이어져왔던 검은색, 주황의 상징색을 부산의 깊은 바다를 상징하는 다크 네이비와 부산광역시의 시화인 동백꽃의 색인 빨간색을 팀의 상징색으로 새롭게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니폼도 전면 교체되었다.2018년에는 7위에 그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조원우 감독은 경질되었으며 양상문이 2005년 이후 13년 만에 감독으로 재임했다.
2. 2. 22. 2019년 시즌
조원우 감독이 물러나고, 제 18대 감독으로 양상문 감독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3월 27일에 삼성 라이온즈전 홈경기에서 4:23이라는 굴욕적인 참패를 당하고, 4월 7일인 한화 이글스전 홈경기에서는 1:16 대패를 당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양상문 감독은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이윤원 단장과 함께 동반 자진 사퇴하였다. 금년 시즌 9월에 최하위가 확정되어 2004년 이후 15년만에 최하위를 기록하게 되었고, 차기 정식 감독으로 키움 히어로즈의 수석코치였던 허문회가 새 감독으로 신임되었다.시즌 중반부터 최하위에 머물렀고, 7월 19일에는 양상문 감독이 사임하고 공필성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취임했으나 10개 구단 체제 이후 처음이자 15년 만에 최하위를 기록했다.
2. 2. 23. 2020년 시즌
성민규 단장이 롯데의 새로운 단장으로 부임하였고, 허문회 감독이 롯데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정규시즌 전 스토브리그에서 국가대표 내야수 안치홍을 영입하였고, 개막 직후부터 홈런을 연이어 터뜨린 딕슨 마차도 등의 선수들을 영입했다. 선수들과 감독, 코치들의 노력으로 개막 5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허문회 감독은 8월에 순위를 끌어올리겠다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되었지만, 결국 시즌을 7위로 마감했다.
롯데의 외국인 투수 댄 스트레일리는 24년 만에 롯데 소속 탈삼진왕이 되었고, 2012년 한화 류현진 이후 200탈삼진 고지를 밟았다.
3. 역대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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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시즌 진출 | 한국시리즈 우승 |
시즌 | 구장 | 리그 | 최종 순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수상 | ||||||||
---|---|---|---|---|---|---|---|---|---|---|---|---|---|---|
순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타율 | 홈런 | 평균자책점 | ||||||
1982 | 구덕 야구장 | KBO | 5/6 | 5/6 | 40 | 13 | 27 | 0 | .325 | .256 | 59 | 3.95 | 진출 실패 | rowspan="2"| |
4/6 | 40 | 18 | 22 | 0 | .450 | |||||||||
1983 | KBO | 6/6 | 4/6 | 50 | 22 | 27 | 1 | .449 | .244 | 78 | 3.79 | 진출 실패 | rowspan="2"| | |
6/6 | 50 | 21 | 29 | 0 | .420 | |||||||||
1984 | KBO | 1/6 | 4/6 | 50 | 21 | 28 | 1 | .429 | .257 | 71 | 3.31 | 우승 한국시리즈 vs. 삼성 라이온즈 (4–3) | 최동원 (MVP) | |
1/6 | 50 | 29 | 20 | 1 | .592 | |||||||||
1985 | KBO | 2/6 | 4/6 | 55 | 27 | 28 | 0 | .491 | .256 | 77 | 3.05 | 진출 실패 | rowspan="2"| | |
2/6 | 55 | 32 | 23 | 0 | .582 | |||||||||
1986 | 사직야구장 | KBO | 5/7 | 3/7 | 54 | 30 | 20 | 4 | .600 | .248 | 37 | 2.74 | 진출 실패 | rowspan="2"| |
5/7 | 54 | 20 | 32 | 2 | .385 | |||||||||
1987 | KBO | 3/7 | 3/7 | 54 | 27 | 25 | 2 | .519 | .268 | 40 | 3.36 | 진출 실패 | rowspan="2"| | |
3/7 | 54 | 27 | 24 | 3 | .528 | |||||||||
1988 | KBO | 3/7 | 4/7 | 54 | 29 | 24 | 1 | .546 | .270 | 68 | 3.59 | 진출 실패 | rowspan="2"| | |
3/7 | 54 | 28 | 25 | 1 | .528 | |||||||||
1989 | KBO | 7/7 | 7/7 | 120 | 48 | 67 | 5 | .421 | .247 | 38 | 3.91 | 진출 실패 | ||
1990 | KBO | 6/7 | 6/7 | 120 | 44 | 71 | 4 | .388 | .245 | 41 | 4.43 | 진출 실패 | ||
1991 | KBO | 4/8 | 4/8 | 126 | 61 | 62 | 3 | .496 | .260 | 73 | 3.91 | 패 준플레이오프 vs. 삼성 라이온즈 (1–1–2) | ||
1992 | KBO | 1/8 | 3/8 | 126 | 71 | 55 | 1 | .563 | .288 | 68 | 4.28 | 우승 준플레이오프 vs. 삼성 라이온즈 (2–0) 우승 플레이오프 vs. 해태 타이거즈 (3–2) 우승 한국시리즈 vs. 빙그레 이글스 (4–1) | 염종석 (신인) | |
1993 | KBO | 6/8 | 6/8 | 126 | 62 | 63 | 1 | .496 | .248 | 29 | 3.33 | 진출 실패 | ||
1994 | KBO | 6/8 | 6/8 | 126 | 56 | 67 | 3 | .456 | .257 | 58 | 4.44 | 진출 실패 | ||
1995 | KBO | 2/8 | 3/8 | 126 | 68 | 53 | 5 | .560 | .255 | 65 | 3.47 | 우승 플레이오프 vs. LG 트윈스 (4–2) 패 한국시리즈 vs. OB 베어스 (3–4) | ||
1996 | KBO | 5/8 | 5/8 | 126 | 57 | 63 | 6 | .476 | .274 | 72 | 4.16 | 진출 실패 | ||
1997 | KBO | 8/8 | 8/8 | 126 | 48 | 77 | 1 | .385 | .237 | 75 | 4.58 | 진출 실패 | ||
1998 | KBO | 8/8 | 8/8 | 126 | 50 | 72 | 4 | .410 | .255 | 86 | 4.61 | 진출 실패 | ||
1999 | 드림리그 | 2/8 | 2/4 | 132 | 75 | 52 | 5 | .591 | .291 | 145 | 4.18 | 우승 플레이오프 vs. 삼성 라이온즈 (4–3) 패 한국시리즈 vs. 한화 이글스 (1–4) | ||
2000 | 매직리그 | 5/8 | 2/4 | 133 | 65 | 64 | 4 | .504 | .260 | 104 | 4.02 | 패 준플레이오프 vs. 삼성 라이온즈 (1–2) | ||
2001 | KBO | 8/8 | 8/8 | 133 | 59 | 70 | 4 | .457 | .280 | 121 | 4.68 | 진출 실패 | ||
2002 | KBO | 8/8 | 8/8 | 133 | 35 | 97 | 1 | .265 | .245 | 85 | 4.74 | 진출 실패 | ||
2003 | KBO | 8/8 | 8/8 | 133 | 39 | 91 | 3 | .300 | .256 | 73 | 5.01 | 진출 실패 | ||
2004 | KBO | 8/8 | 8/8 | 133 | 50 | 72 | 11 | .410 | .252 | 88 | 4.22 | 진출 실패 | ||
2005 | KBO | 5/8 | 5/8 | 126 | 58 | 67 | 1 | .464 | .253 | 83 | 4.31 | 진출 실패 | 손민한 (MVP) | |
2006 | KBO | 7/8 | 7/8 | 126 | 50 | 73 | 3 | .407 | .250 | 88 | 3.88 | 진출 실패 | ||
2007 | KBO | 7/8 | 7/8 | 126 | 55 | 68 | 3 | .447 | .270 | 76 | 4.14 | 진출 실패 | ||
2008 | KBO | 3/8 | 3/8 | 126 | 69 | 57 | 0 | .548 | .282 | 93 | 3.64 | 패 준플레이오프 vs. 삼성 라이온즈 (0–3) | ||
2009 | KBO | 4/8 | 4/8 | 133 | 66 | 67 | 0 | .496 | .277 | 121 | 4.75 | 패 준플레이오프 vs. 두산 베어스 (1–3) | ||
2010 | KBO | 4/8 | 4/8 | 133 | 69 | 61 | 3 | .531 | .288 | 185 | 4.82 | 패 준플레이오프 vs. 두산 베어스 (2–3) | 이대호 (MVP) | |
2011 | KBO | 3/8 | 2/8 | 133 | 72 | 56 | 5 | .563 | .288 | 111 | 4.20 | 패 플레이오프 vs. SK 와이번스 (2–3) | ||
2012 | KBO | 4/8 | 4/8 | 133 | 65 | 62 | 6 | .512 | .263 | 73 | 3.48 | 우승 준플레이오프 vs. 두산 베어스 (3–1) 패 플레이오프 vs. SK 와이번스 (2–3) | ||
2013 | KBO | 5/9 | 5/9 | 128 | 66 | 58 | 4 | .532 | .261 | 61 | 3.93 | 진출 실패 | ||
2014 | KBO | 7/9 | 7/9 | 128 | 59 | 68 | 1 | .457 | .287 | 121 | 5.19 | 진출 실패 | ||
2015 | KBO | 8/10 | 8/10 | 144 | 66 | 77 | 1 | .462 | .280 | 177 | 5.07 | 진출 실패 | ||
2016 | KBO | 8/10 | 8/10 | 144 | 66 | 78 | 0 | .458 | .288 | 127 | 5.63 | 진출 실패 | ||
2017 | KBO | 3/10 | 3/10 | 144 | 80 | 62 | 2 | .563 | .285 | 151 | 4.56 | 패 준플레이오프 vs. NC 다이노스 (2–3) | ||
2018 | KBO | 7/10 | 7/10 | 144 | 68 | 74 | 2 | .479 | .289 | 203 | 5.37 | 진출 실패 | ||
2019 | KBO | 10/10 | 10/10 | 144 | 48 | 93 | 3 | .340 | .250 | 90 | 4.83 | 진출 실패 | ||
2020 | KBO | 7/10 | 7/10 | 144 | 71 | 72 | 1 | .497 | .276 | 131 | 4.64 | 진출 실패 | ||
2021 | KBO | 8/10 | 8/10 | 144 | 65 | 71 | 8 | .478 | .278 | 107 | 5.37 | 진출 실패 | ||
2022 | KBO | 8/10 | 8/10 | 144 | 64 | 76 | 4 | .457 | .267 | 106 | 4.45 | 진출 실패 | ||
2023 | KBO | 7/10 | 7/10 | 144 | 68 | 76 | 0 | .472 | .265 | 69 | 4.15 | 진출 실패 | ||
2024 | KBO | 7/10 | 7/10 | 144 | 66 | 74 | 4 | .471 | .285 | 125 | 5.05 | 진출 실패 |
3. 1. 정규시즌
롯데 자이언츠는 1982년 KBO 리그 원년부터 참가한 팀으로, 정규시즌에서 다양한 성적을 기록했다. 1984년과 1992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에는 최동원이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고, 1992년에는 염종석이 올해의 신인(ROTY)으로 선정되었다. 1995년, 1999년, 2011년에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2005년에는 손민한이 MVP를 수상했고, 2010년에는 이대호가 MVP를 수상했다.롯데 자이언츠의 정규시즌 통산 성적은 2,456승 124무 2,767패, 승률 0.470이다. (2024년 시즌 종료 기준)
연도 | 승 | 무 | 패 | 승률 | 순위 |
---|---|---|---|---|---|
롯데 자이언츠 | |||||
1982 | 31 (13/18) | 0 (0/0) | 49 (27/22) | 0.388 (0.325/0.450) | 5 (5/4) |
1983 | 43 (22/21) | 1 (1/0) | 56 (27/29) | 0.434 (0.449/0.429) | 6 (4/6) |
1984 | 50 (21/29) | 2 (1/1) | 48 (28/20) | 0.510 (0.429/0.592) | 4 (4/1) |
1985 | 59 (27/32) | 51 (28/23) | 0 (0/0) | 0.536 (0.491/0.582) | 2 (4/2) |
1986 | 50 (30/20) | 6 (4/2) | 52 (20/32) | 0.490 (0.600/0.385) | 5 (3/5) |
1987 | 54 (27/27) | 5 (2/3) | 49 (25/24) | 0.523 (0.519/0.528) | 3 (3/3) |
1988 | 57 (29/28) | 2 (1/1) | 49 (24/25) | 0.537 (0.546/0.528) | 3 (4/3) |
1989 | 48 | 5 | 67 | 0.421 | 7 |
1990 | 44 | 4 | 71 | 0.388 | 6 |
1991 | 61 | 3 | 62 | 0.496 | 4 |
1992 | 71 | 1 | 55 | 0.563 | 1 |
1993 | 62 | 1 | 63 | 0.496 | 6 |
1994 | 56 | 3 | 67 | 0.456 | 6 |
1995 | 68 | 5 | 53 | 0.560 | 2 |
1996 | 68 | 5 | 53 | 0.560 | 5 |
1997 | 57 | 6 | 63 | 0.476 | 8 |
1998 | 50 | 4 | 72 | 0.410 | 8 |
1999 | 75 | 5 | 52 | 0.591 | 1(드림) |
2000 | 65 | 4 | 64 | 0.504 | 2(매직) |
2001 | 59 | 4 | 70 | 0.469 | 8 |
2002 | 35 | 1 | 97 | 0.265 | 8 |
2003 | 39 | 3 | 91 | 0.300 | 8 |
2004 | 50 | 11 | 72 | 0.410 | 8 |
2005 | 58 | 1 | 67 | 0.464 | 5 |
2006 | 50 | 3 | 73 | 0.407 | 7 |
2007 | 55 | 3 | 68 | 0.447 | 7 |
2008 | 69 | 0 | 57 | 0.548 | 3 |
2009 | 66 | 0 | 67 | 0.496 | 4 |
2010 | 69 | 3 | 61 | 0.519 | 4 |
2011 | 72 | 5 | 56 | 0.563 | 3 |
2012 | 65 | 6 | 62 | 0.512 | 4 |
2013 | 66 | 4 | 58 | 0.532 | 5 |
2014 | 59 | 1 | 68 | 0.452 | 7 |
2015 | 66 | 1 | 77 | 0.462 | 8 |
2016 | 66 | 0 | 78 | 0.458 | 8 |
2017 | 80 | 2 | 62 | 0.563 | 3 |
2018 | 68 | 2 | 74 | 0.479 | 7 |
2019 | 48 | 3 | 93 | 0.340 | 10 |
2020 | 71 | 1 | 72 | 0.497 | 7 |
2021 | 65 | 8 | 71 | 0.478 | 8 |
2022 | 64 | 4 | 76 | 0.475 | 8 |
2023 | 68 | 0 | 76 | 0.472 | 7 |
2024 | 66 | 4 | 74 | 0.471 | 7 |
합계 | 2,456 | 124 | 2,767 | 0.470 | — |
3. 2. 포스트시즌
롯데 자이언츠는 1984년과 1992년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최동원이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었다.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염종석이 올해의 신인(ROTY)으로 선정되었다. 1995년,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각각 OB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에 패했다.롯데 자이언츠는 준플레이오프에서 1991년, 2000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7년에 패했다. 2012년에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승리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995년에 승리했고, 1992년, 1999년, 2011년, 2012년에는 패했다. 포스트시즌 통산 기록은 39승 1무 42패이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는 구덕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고, 1986년부터는 사직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5년에는 손민한이 MVP를 수상했고, 2010년에는 이대호가 MVP를 수상했다.
3. 3. 한국시리즈
롯데 자이언츠는 1984년과 1992년, 두 차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84년에는 강병철 감독의 지휘 아래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4승 3패로 첫 우승을 차지했고, 당시 외야수 유두열이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1992년에는 강병철 감독이 다시 한번 팀을 이끌며 빙그레 이글스를 4승 1패로 꺾고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으며, 투수 박동희가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1995년과 1999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각각 OB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 | 연도 | 감독 | 상대 팀 | 경기 결과 | 우승 횟수 | 시리즈 MVP | |
---|---|---|---|---|---|---|---|
1 | 1984년 | 강병철 | 삼성 라이온즈 | 4승 3패 (OXOXXOO) | V1 | 유두열 (외야수) | |
2 | 1992년 | 강병철 | 빙그레 이글스 | 4승 1패 (OOXOO) | V2 | 박동희 (투수) | |
3 | 1995년 | 김용희 | OB 베어스 | 3승 4패 (OXXOOXX) | |||
4 | 1999년 | 김명성 | 한화 이글스 | 1승 4패 (XXOXX) | |||
한국시리즈 총 2회 우승 |
4. 응원
롯데 자이언츠는 KBO 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 중 하나이다.[8] 갤럽 설문조사에 따르면, 롯데 자이언츠는 3년 연속 가장 인기 있는 팀으로 선정되었다.[8] 1991년, 롯데 자이언츠는 한 시즌 홈 경기 관중 100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한국 팀이 되었다.[9] 2009년 시즌에는 홈 관중 1,380,018명으로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10] 2011년 시즌에도 67경기 홈 경기에서 총 1,358,322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리그 1위를 차지했다.[11] 경기당 평균 관중은 20,273명이었으며, 이는 경기당 평균 71%의 좌석 점유율을 의미한다.[11]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연속 100만 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했다.[9]
팬들 사이에서는 가요곡 「부산항에 가면」과 「부산 갈매기(※갈매기는 한국어로 "갈매기"의 뜻)」가 자리 잡았으며, 응원가로 자주 불리고 있다.
## 응원 문화
1980년대 당시 배우 유퉁이 무명시절 사직야구장에 갔다가 음주와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의 사설 응원단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이 사설 응원단장 문화는 한국 프로야구의 구단 전속 응원단장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31] 관중들은 신문지를 찢어 만든 꽃술을 흔들며 부산갈매기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을 부르며 응원한다. 경기 후반에는 쓰레기 수거용 주황색 비닐 봉지를 머리에 쓰고 응원한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응원 구호는 "짝짝, 짝짝짝, 짝짝짝짝, 롯데!"이다.
상대팀이 게임을 지연하거나 비신사적인 플레이를 하면 투수에게 유키스의 "만만하니"의 음악에 맞춰서 '마!' (동남 방언로 "인마"를 뜻함)를 외친다.[32] 1999년 시즌 당시 정민태 투수가 주자를 견제할 때 관중들이 '마'라고 외쳐 투수를 위축시키고자 만들어졌으며, 이후 한 응원 단장이 이 구호를 모든 구단의 투수에게 사용하면서 지금의 '마'가 되었다. 몇몇 구단은 맞대응을 하기도 하는데, 과거 삼성 라이온즈 응원석에서는 "와!"를 외쳤고, 지금은 두산 베어스 응원석과 LG 트윈스 응원석에서 "왜!"를, SK 와이번스 응원석에서는 "쉬"[33]를, NC 다이노스 응원석에서는 "산!"을 외치며 맞받아 친다. 2010년부터는 이런 상대의 대응에 대해 다시 롯데의 응원석에서 미쓰에이의 'Bad Girl Good Girl'의 한 부분인 'Shut up boy, So shut up boy, So shut up boy, So shut up, Shut up'[34]을 외치며 맞대응한다.
투수가 상대팀의 타자를 삼진 및 더블(트리플) 플레이, 도루 저지로 아웃시키면 Witches의 '떴다 그녀'의 전주가 흘러나오는데, 이 전주가 모두 끝나면 이 곡의 맨 첫 소절의 가사인 '어느 날~!'만 외치고 끝나게 된다.
교학사가 2009년 출간을 위해 제작중인 중학교 1학년 사회 교과서에 '레저스포츠 및 응원을 통한 사회화’라는 단원에 사직구장 응원문화에 대한 내용과 사진이 실렸으며,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판되었다.[35]
## 응원가
롯데 자이언츠의 응원가로는 팝송이 많이 사용된다. 대표적인 응원가와 그 원곡은 다음과 같다. 모두 원곡 멜로디를 바탕으로 그대로 부른다.
- Dream Of Ground - 1회 말 종료 시
- 미스터 자이언츠(Mr. Giants) - 5회 말 종료 후 선수들의 몸 풀기 시
-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 9회 말(원정 시 9회 초) 또는 역전 시
- 부산 갈매기(문성재) - 9회 말(원정 시 9회 초) 또는 역전 시 [현재 KBO 저작권 문제로 공식적으로 사용을 못하고있다. 팬들이 자체적으로 원정을 갈때는 암묵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밤 10시가 지나면 엠프를 끄는데 엠프를 끄면 응원단장인 조지훈이 부산갈매기를 부르도록 지도한다.]
- Just Victory
- Forever Giants
- 오, 최강롯데(워털루 로드/Waterloo Road영어[36]) - 롯데 자이언츠 투수 교체 시
- 승리의 롯데(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행진곡/Battle Hymn of the Republic영어[37])
- 우리는 최강롯데
- 롯데자이언츠 오오오~~(위 아 낫 고나 테이크 잇/We're Not Gonna Take It영어)
- 바다새(김혜정)
- 31.손아섭 - 스트레이트 스루 마이 하트/Straight Through My Heart영어, 등장곡: 장미여관 - 오빠라고 불러다오
: 자이언츠~ 손아섭~ 승리를 위해~ 오오~(X4)
- 8.전준우 -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영어, 등장곡 : 스타스트럭/3OH!3-Starstrukk영어 (전준우 등장시 팬들은 박자에 맞춰서 "유후"를 부른다 )
: 안타 안타 쌔리라 쌔리라 롯데 전준우~ (4회 반복)
:대호 대호 대호 대호 대호 대호 대호 오 롯데 이대호 오 오 롯데 이대호 오 오 롯데 이대호 롯데 이대호 롯데 이대호 오오오오오오
: 오 롯데 이대호 오 오 롯데 이대호 오 오 롯데 이대호 롯데 이대호 롯데 이대호
: (빠빠빠빠 빠바밤) 홈~런~ 이!대!호! (빠바바바 빠바바바 바바밤) 홈~런~ 이!대!호
: 오~정훈~ 자이언츠 정훈~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 (X2)
: 롯데의 (헤이!) 신~본기 (헤이!) 롯데의~승리를 위해 롯데의 (헤이!) 신~본기 (헤이!) 오오오오~오~오~
- 6.문규현 - 진 켈리/Gene Kelly영어의 '싱잉 인 더 레인/Singing in the Rain영어'
: 롯~데의 문규현~ 롯~데의 문규현~ 오오오오오오~ 롯!데! 문!규!현!(X2)
: 롯데 자이언츠 안타 김문호 롯데 자이언츠 김문호 롯데 자이언츠 안타 김문호 오오오오오오~
- 23.나경민 - J. 가일스 밴드/J.Geils Band영어의 '센터폴드/Centerfold영어'
: 라라라 라라라 롯데롯데 나경민x4
- 98.앤디 번즈 - 더 벤처스/The Ventures영어 - 하와이 파이브-오/Hawaii Five-0영어
: 롯데 앤디 번즈 오오오오오~x4
- 25.한동희 - 자작가
: 롯데의~(짝짝) 한동희~(짝짝) 안타 안타 한동희~(짝짝) 롯데의~(짝짝) 한동희~(짝짝) 오 오 오오오 오 오~ X2
- 송승준 - 돈 깁슨/Don Gibson영어의 '아이 캔트 스탑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영어'
: 송승준 파이팅 오오오오 롯데 송승준 오오오오x2
- '모스카우/Moskaude'
## 응원단
응원단장은 조지훈이며, 치어리더로는 조윤경, 서이준, 김승은, 이윤정, 김보경, 허수미, 고민지, 곽혜인, 이단비, 박예진, 이다영, 최정희, 안지현등이 활동하고 있다. 과거에 활동했던 치어리더로는 염지원, 김다빈, 금보아, 표은지, 이가현, 김한별, 김단비,최홍라등이 있다.
4. 1. 응원 문화
1980년대 당시 배우 유퉁이 무명시절 사직야구장에 갔다가 음주와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의 사설 응원단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이 사설 응원단장 문화는 한국 프로야구의 구단 전속 응원단장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31] 관중들은 신문지를 찢어 만든 꽃술을 흔들며 부산갈매기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을 부르며 응원한다. 경기 후반에는 쓰레기 수거용 주황색 비닐 봉지를 머리에 쓰고 응원한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응원 구호는 "짝짝, 짝짝짝, 짝짝짝짝, 롯데!"이다. 경기 도중 야구공이 관중석으로 들어오면 "아주라"를 외치는데, 그러면 공을 잡은 어른은 주위의 어린이에게 그 공을 주는 문화가 있다. "아주라"는 "아이(에게) 주어라"라는 말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최근 "아주라"가 나쁜 의도로 사용되어 현재는 거의 사라졌다.상대팀이 게임을 지연하거나 비신사적인 플레이를 하면 투수에게 유키스의 "만만하니"의 음악에 맞춰서 '마!' (동남 방언로 "인마"를 뜻함)를 외친다.[32] 1999년 시즌 당시 정민태 투수가 주자를 견제할 때 관중들이 '마'라고 외쳐 투수를 위축시키고자 만들어졌으며, 이후 한 응원 단장이 이 구호를 모든 구단의 투수에게 사용하면서 지금의 '마'가 되었다. 몇몇 구단은 맞대응을 하기도 하는데, 과거 삼성 라이온즈 응원석에서는 "와!"를 외쳤고, 지금은 두산 베어스 응원석과 LG 트윈스 응원석에서 "왜!"를, SK 와이번스 응원석에서는 "쉬"[33]를, NC 다이노스 응원석에서는 "산!"을 외치며 맞받아 친다. 2010년부터는 이런 상대의 대응에 대해 다시 롯데의 응원석에서 미쓰에이의 'Bad Girl Good Girl'의 한 부분인 'Shut up boy, So shut up boy, So shut up boy, So shut up, Shut up'[34]을 외치며 맞대응한다.
투수가 상대팀의 타자를 삼진 및 더블(트리플) 플레이, 도루 저지로 아웃시키면 Witches의 '떴다 그녀'의 전주가 흘러나오는데, 이 전주가 모두 끝나면 이 곡의 맨 첫 소절의 가사인 '어느 날~!'만 외치고 끝나게 된다.
교학사가 2009년 출간을 위해 제작중인 중학교 1학년 사회 교과서에 '레저스포츠 및 응원을 통한 사회화’라는 단원에 사직구장 응원문화에 대한 내용과 사진이 실렸으며,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판되었다.[35]
롯데 자이언츠는 KBO 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 중 하나이다.[8] 갤럽 설문조사에 따르면, 롯데 자이언츠는 3년 연속 가장 인기 있는 팀으로 선정되었다.[8] 1991년, 롯데 자이언츠는 한 시즌 홈 경기 관중 100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한국 팀이 되었다.[9] 2009년 시즌에는 홈 관중 1,380,018명으로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10] 2011년 시즌에도 67경기 홈 경기에서 총 1,358,322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리그 1위를 차지했다.[11] 경기당 평균 관중은 20,273명이었으며, 이는 경기당 평균 71%의 좌석 점유율을 의미한다.[11]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연속 100만 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했다.[9]
팬들 사이에서는 가요곡 「부산항에 가면」과 「부산 갈매기(※갈매기는 한국어로 "갈매기"의 뜻)」가 자리 잡았으며, 응원가로 자주 불리고 있다.
4. 2. 응원가
롯데 자이언츠는 KBO 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 중 하나이다.[8] 2011년 갤럽 설문조사에 따르면, 3년 연속 가장 인기 있는 팀으로 선정되었다.[8] 팬들 사이에서는 가요곡 「부산항에 가면」과 「부산 갈매기(※갈매기는 한국어로 "갈매기"의 뜻)」가 응원가로 자주 불리고 있다.롯데 자이언츠의 응원가로는 팝송이 많이 사용된다. 대표적인 응원가와 그 원곡은 다음과 같다. 모두 원곡 멜로디를 바탕으로 그대로 부른다.
- Dream Of Ground - 1회 말 종료 시
- 미스터 자이언츠(Mr. Giants) - 5회 말 종료 후 선수들의 몸 풀기 시
-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 9회 말(원정 시 9회 초) 또는 역전 시
- 부산 갈매기(문성재) - 9회 말(원정 시 9회 초) 또는 역전 시 [현재 KBO 저작권 문제로 공식적으로 사용을 못하고있다. 팬들이 자체적으로 원정을 갈때는 암묵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밤 10시가 지나면 엠프를 끄는데 엠프를 끄면 응원단장인 조지훈이 부산갈매기를 부르도록 지도한다.]
- Just Victory
- Forever Giants
- 오, 최강롯데(워털루 로드/Waterloo Road영어[36]) - 롯데 자이언츠 투수 교체 시
- 승리의 롯데(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행진곡/Battle Hymn of the Republic영어[37])
- 우리는 최강롯데
- 롯데자이언츠 오오오~~(위 아 낫 고나 테이크 잇/We're Not Gonna Take It영어)
- 바다새(김혜정)
- 31.손아섭 - 스트레이트 스루 마이 하트/Straight Through My Heart영어, 등장곡: 장미여관 - 오빠라고 불러다오
: 자이언츠~ 손아섭~ 승리를 위해~ 오오~(X4)
- 8.전준우 -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영어, 등장곡 : 스타스트럭/3OH!3-Starstrukk영어 (전준우 등장시 팬들은 박자에 맞춰서 "유후"를 부른다 )
: 안타 안타 쌔리라 쌔리라 롯데 전준우~ (4회 반복)
:대호 대호 대호 대호 대호 대호 대호 오 롯데 이대호 오 오 롯데 이대호 오 오 롯데 이대호 롯데 이대호 롯데 이대호 오오오오오오
: 오 롯데 이대호 오 오 롯데 이대호 오 오 롯데 이대호 롯데 이대호 롯데 이대호
: (빠빠빠빠 빠바밤) 홈~런~ 이!대!호! (빠바바바 빠바바바 바바밤) 홈~런~ 이!대!호
: 오~정훈~ 자이언츠 정훈~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 (X2)
: 롯데의 (헤이!) 신~본기 (헤이!) 롯데의~승리를 위해 롯데의 (헤이!) 신~본기 (헤이!) 오오오오~오~오~
- 6.문규현 - 진 켈리/Gene Kelly영어의 '싱잉 인 더 레인/Singing in the Rain영어'
: 롯~데의 문규현~ 롯~데의 문규현~ 오오오오오오~ 롯!데! 문!규!현!(X2)
: 롯데 자이언츠 안타 김문호 롯데 자이언츠 김문호 롯데 자이언츠 안타 김문호 오오오오오오~
- 23.나경민 - J. 가일스 밴드/J.Geils Band영어의 '센터폴드/Centerfold영어'
: 라라라 라라라 롯데롯데 나경민x4
- 98.앤디 번즈 - 더 벤처스/The Ventures영어 - 하와이 파이브-오/Hawaii Five-0영어
: 롯데 앤디 번즈 오오오오오~x4
- 25.한동희 - 자작가
: 롯데의~(짝짝) 한동희~(짝짝) 안타 안타 한동희~(짝짝) 롯데의~(짝짝) 한동희~(짝짝) 오 오 오오오 오 오~ X2
- 송승준 - 돈 깁슨/Don Gibson영어의 '아이 캔트 스탑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영어'
: 송승준 파이팅 오오오오 롯데 송승준 오오오오x2
- '모스카우/Moskaude'
4. 3. 응원단
롯데 자이언츠는 KBO 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 중 하나이다.[8] 2011년 실시된 갤럽 설문조사에 따르면, 롯데 자이언츠는 3년 연속 가장 인기 있는 팀으로 선정되었다.[8] 1991년, 롯데 자이언츠는 한 시즌 홈 경기 관중 100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한국 팀이 되었다.[9] 2009년 시즌에는 홈 관중 1,380,018명으로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10] 2011년 시즌에도 67경기 홈 경기에서 총 1,358,322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리그 1위를 차지했다.[11] 경기당 평균 관중은 20,273명이었으며, 이는 경기당 평균 71%의 좌석 점유율을 의미한다.[11]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연속 100만 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했다.[9]
응원단장은 조지훈이며, 치어리더로는 조윤경, 서이준, 김승은, 이윤정, 김보경, 허수미, 고민지, 곽혜인, 이단비, 박예진, 이다영, 최정희, 안지현등이 활동하고 있다. 과거에 활동했던 치어리더로는 염지원, 김다빈, 금보아, 표은지, 이가현, 김한별, 김단비,최홍라등이 있다.
팬들 사이에서는 가요곡 「부산항에 가면」과 「부산 갈매기(※갈매기는 한국어로 "갈매기"의 뜻)」가 자리 잡았으며, 응원가로 자주 불리고 있다.
5. 선수단
5. 1. 현 선수단
포지션 | 등번호 | 이름 | 투 | 타 | 비고 |
---|---|---|---|---|---|
투수 | 1 | 한현희 | 우 | 우 | |
투수 | 12 | 정우준 | 우 | 우 | |
투수 | 15 | 김진욱 | 좌 | 좌 | |
투수 | 17 | 현도훈 | 우 | 좌 | |
투수 | 18 | 정성종 | 우 | 좌 | |
투수 | 19 | 김강현 | 우 | 좌 | |
투수 | 21 | 박세웅 | 우 | 우 | |
투수 | 22 | 구승민 | 우 | 우 | |
투수 | 23 | 김도규 | 우 | 우 | |
투수 | 24 | 김상수 | 우 | 우 | |
투수 | 26 | 진승현 | 우 | 좌 | |
투수 | 28 | 찰리 번즈 (Charlie Barnes) | 좌 | 좌 | |
투수 | 30 | 이민석 | 우 | 우 | |
투수 | 31 | 진해수 | 좌 | 좌 | |
투수 | 34 | 김원중 | 우 | 좌 | |
투수 | 37 | 정현수 | 좌 | 좌 | |
투수 | 38 | 홍민기 | 좌 | 좌 | |
투수 | 39 | 심재민 | 좌 | 우 | |
투수 | 40 | 박진형 | 우 | 우 | |
투수 | 43 | 나균안 | 우 | 우 | |
투수 | 44 | 박진 | 우 | 우 | |
투수 | 45 | 윤성빈 | 우 | 우 | |
투수 | 47 | 이승헌 | 우 | 우 | 육성 선수 |
투수 | 49 | 최이준 | 우 | 우 | |
투수 | 56 | 최준용 | 우 | 우 | |
투수 | 58 | 박준우 | 우 | 우 | |
투수 | 59 | 송재영 | 좌 | 좌 | |
투수 | 60 | 신병률 | 우 | 우 | |
투수 | 61 | 전밀 | 우 | 우 | |
투수 | 65 | 정철원 | 우 | 우 | 두산에서 트레이드 이적 |
투수 | 108 | 배세종 | 우 | 우 | 육성 선수 |
투수 | 115 | 박영완 | 우 | 좌 | 육성 선수 |
투수 | 116 | 박재민 | 좌 | 좌 | 육성 선수 |
투수 | 118 | 이병준 | 우 | 우 | 육성 선수 |
투수 | 123 | 하혜성 | 우 | 우 | 육성 선수 |
투수 | 미정 | 박시영 | 우 | 우 | KT에서 이적 |
투수 | 미정 | 터커 데이비드슨 (Tucker Davidson) | 좌 | 좌 | 신 외국인 선수 |
투수 | 미정 | 김태현 | 좌 | 좌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1순위 |
투수 | 미정 | 박세현 | 우 | 우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2순위 |
투수 | 미정 | 김현우 | 우 | 우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3순위 |
투수 | 미정 | 이영재 | 좌 | 좌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7순위 |
투수 | 미정 | 김태균 | 우 | 우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10순위 |
투수 | 미정 | 조영우 | 우 | 우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11순위 |
투수 | 미정 | 정성우 | 좌 | 좌 | 신입단 육성 선수 |
투수 | 김창훈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
투수 | 조경민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
투수 | 석상호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
투수 | 장세진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
투수 | 이태연 | 좌 | 좌 | 군 보류 선수 | |
투수 | 이진하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
투수 | 김기준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육성 선수 | |
투수 | 전하원 | 우 | 좌 | 군 보류 선수 육성 선수 | |
투수 | 박성준 | 좌 | 좌 | 군 보류 선수 육성 선수 | |
포수 | 00 | 손성빈 | 우 | 우 | |
포수 | 27 | 유강남 | 우 | 우 | |
포수 | 32 | 강태율 | 우 | 우 | |
포수 | 36 | 강승구 | 우 | 우 | |
포수 | 42 | 정보근 | 우 | 우 | |
포수 | 55 | 백두산 | 우 | 우 | |
포수 | 69 | 서동욱 | 우 | 우 | |
포수 | 122 | 엄장윤 | 우 | 우 | 육성 선수 |
포수 | 미정 | 박재엽 | 우 | 우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4순위 |
포수 | 미정 | 박건우 | 우 | 우 | 신입단 육성 선수 |
포수 | 미정 | 박준기 | 우 | 좌 | 신입단 육성 선수 |
내야수 | 3 | 신윤후 | 우 | 우 | |
내야수 | 9 | 정훈 | 우 | 우 | |
내야수 | 13 | 전민재 | 우 | 우 | 두산에서 트레이드 이적 |
내야수 | 14 | 최항 | 우 | 좌 | |
내야수 | 16 | 김민성 | 우 | 우 | |
내야수 | 33 | 손호영 | 우 | 우 | |
내야수 | 51 | 나승엽 | 우 | 좌 | |
내야수 | 52 | 노진혁 | 우 | 좌 | |
내야수 | 53 | 박승욱 | 우 | 좌 | |
내야수 | 63 | 이주찬 | 우 | 우 | |
내야수 | 67 | 강성우 | 우 | 우 | |
내야수 | 98 | 이호준 | 우 | 좌 | |
내야수 | 114 | 김동규 | 우 | 우 | 육성 선수 |
내야수 | 미정 | 고승민 | 우 | 좌 | 65번에서 번호 변경 |
내야수 | 미정 | 한태양 | 우 | 우 | 병역 복귀 |
내야수 | 미정 | 최민규 | 우 | 우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8라운드 |
내야수 | 미정 | 이태경 | 우 | 우 | 신인 입단 육성 선수 |
내야수 | 미정 | 박지훈 | 우 | 우 | 신인 입단 육성 선수 |
내야수 | 미정 | 유태은 | 우 | 우 | 신인 입단 육성 선수 |
내야수 | 김세민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
내야수 | 한동희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
내야수 | 정대선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
내야수 | 배인혁 | 우 | 좌 | 군 보류 선수 육성 선수 | |
내야수 | 안우진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육성 선수 | |
외야수 | 0 | 황성빈 | 우 | 좌 | |
외야수 | 7 | 장두성 | 우 | 좌 | 13번에서 변경 |
외야수 | 8 | 전준우 | 우 | 우 | |
외야수 | 29 | 빅터 레이예스(Víctor Reyes) | 우 | 양 | |
외야수 | 48 | 이정훈 | 우 | 좌 | |
외야수 | 50 | 김동혁 | 좌 | 좌 | |
외야수 | 54 | 이인한 | 우 | 우 | |
외야수 | 91 | 윤동희 | 우 | 우 | |
외야수 | 95 | 이선우 | 우 | 우 | |
외야수 | 110 | 김대현 | 우 | 우 | 육성 선수 |
외야수 | 미정 | 조세진 | 우 | 우 | 병역 복귀 |
외야수 | 미정 | 김동현 | 우 | 좌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6라운드 |
외야수 | 미정 | 한승현 | 우 | 우 | 2025년 신인 드래프트 9라운드 |
외야수 | 미정 | 이상화 | 우 | 우 | 신입 선수 육성 선수 |
외야수 | 미정 | 오창현 | 좌 | 좌 | 신입 선수 육성 선수 |
외야수 | 윤수녕 | 우 | 좌 | 군 보류 선수 | |
외야수 | 박건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육성 선수 | |
외야수 | 류제모 | 우 | 좌 | 군 보류 선수 육성 선수 | |
외야수 | 소한빈 | 우 | 우 | 군 보류 선수 |
5. 2. 역대 감독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 감독은 박영길이었으며, 현재 감독은 김태형이다. 전임 감독의 사임이나 해임 이후 공석 상황에서 취임한 감독 대행까지 포함한다.- 박영길 (1982–1983) 1983년 시즌 중반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
- 강병철 (1983–1986) 1983년 시즌은 감독 대행이었다.
- 성기영 (1987)
- 어우홍 (1988-1989)
- 김진영 (1990개막-1990.8.28.)
- 도이 쇼스케 (1990.8.29-1990시즌 종료) 감독 대행. 한국 등록명은 '''도위창'''(都偉彰, 도위창한국어)이며, 대행을 포함하면 한국 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감독직을 수행한 외국인이다.
- 강병철【2기】(1991-1993)
- 김용희 (1994-1998.6.16.) 1998년 시즌 중반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
- 김명성 (1998.6.17.-2001.7.24.) 1998년은 감독 대행이었으며, 2001년 7월 24일 심근경색으로 급사하였다.
- 우용득 (2001.7.24.-2002.6.21.) 2001년은 감독 대행이었으며, 2002년 시즌 중반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
- 김용희 (2002.6.22.-2002.6.24.) (감독 대행)
- 백인천 (2002.6.25.-2003.8.5.) 2002년 시즌 중반, 감독 대행 김용희의 뒤를 이어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였으나, 2003년 시즌 중반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
- 김용철 (2003.8.6.-2003시즌 종료) (감독 대행)
- 양상문【1기】(2004-2005)
- 강병철【3기】(2006-2007)
- 제리 로이스터 (2008-2010)
- 양승호 (2011-2012)
- 권두조 (2012 아시아 시리즈) (감독 대행)
- 김시진 (2013-2014)
- 이종운 (2015)
- 조원우 (2016-2018)
- 양상문【2기】(2019.2 - 2019.7.18)
- 공필성 (2019.7.19.-2019.10.1) (감독 대행)
- 허문회 (2020-2021.5.10)
- 래리 서튼 (2021.5.11-2023.8.28)
- 이종운 (2023.8.29-10.17) (감독 대행)
- 김태형 (2024-)
5. 3. 역대 선수
롯데 자이언츠는 다양한 선수들이 거쳐 갔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활동한 최동원은 롯데 창단 초기 에이스였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해 시즌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선수회 창설을 주도하다 구단의 협박에 굴복, 1989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고, 1990년 은퇴했다. 롯데는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윤학길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 롯데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한국 프로야구 통산 최다 완투 및 완투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박동희는 1990년대 초반 최동원의 뒤를 이을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제구력 난조와 부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92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박정태는 한 손으로 배트를 잡는 타격폼으로 알려진 1990년대 후반 팀의 리더였다. 전준호는 박정태와 입단 동기로, 1992년 우승 주역 중 한 명이다. 염종석은 1992년 신인왕을 수상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지만, 이후 부상에 시달렸다. 주형광은 14년간 롯데에서만 활약한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다.
마해영은 1999년 최고 타격률을 기록하는 등 1990년대 후반 팀의 주포였다. 문동환은 1997년 입단하여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했다. 펠릭스 호세는 1999년, 2001년,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롯데에서 활약한 외국인 타자다.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대구 대난투'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노장진은 강속구 마무리 투수였지만, 사생활 문제가 많았다. 정수근은 현역 시절 술 관련 사건이 많았다. 데이비드 코르테스는 2008년 마무리 투수를 맡았다. 손민한은 뛰어난 제구력과 수비력을 갖춘 투수로, 2005년 시즌 MVP를 수상했다.
김주찬은 2001년 마해영과의 트레이드로 삼성에서 이적해 빠른 발을 이용한 외야수로 활약했다. 홍성흔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롯데의 클린업 타자로 활약했다. 스콧 리치몬드는 2013년 스프링캠프 중 부상으로 방출되었다. 조성환은 주장으로 오랫동안 팀에 기여했다.
박기혁은 수비형 유격수로 활약했다. 장원준은 2006년부터 선발 중심으로 활약했다. 쉐인 유먼은 주로 선발로 활약했다. 장성호는 베테랑 강타자로 입단했지만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황재균은 전 메이저리거이자 현 KT 위즈 소속이다. 강민호는 국가대표 포수 출신으로 현재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다. 손승락은 넥센에서 합류한 마무리 투수였다. 조쉬 린드스트롬과 짐 아두치는 각각 2015-2016, 2017년에 롯데에서 뛰었다. 아두치는 약물 복용으로 해고되었다.
저스틴 맥스웰은 아두치의 대체 선수였다. 펠릭스 두브론과 앤디 번즈는 각각 2018년과 2017-2018년에 롯데 소속이었다. 제이크 톰슨, 브록 다이크존, 카를로스 아수아헤는 모두 2019년에 롯데에서 뛰었다. 브룩스 레일리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롯데에서 활약했다.
배장호는 사이드암 중간 계투로 활약했다. 에이드리언 샘슨은 2020년 롯데 소속이었다. 이병규는 LG에서 이적해 우투수 대타로 활약했다. 송승준은 15년간 롯데에 소속되었다. 손아섭은 최다 안타 4회를 기록한 정상급 타자다.
민병헌은 FA로 두산에서 이적했지만, 뇌동맥류 치료를 위해 은퇴했다. 딕슨 마차도는 2020-2021년 롯데 소속이었다. DJ 피터스는 2022년에 롯데에서 뛰었다. 이대호는 2001-2011년, 2017-2022년 롯데에서 활약한 전 오릭스, 소프트뱅크 선수다. 잭 레크스와 댄 스트레이리는 2022-2023년에 롯데 소속이었다.
차우찬, 윤명준, 구하성, 문규찬은 2023년에, 니코 굿럼과 안치홍은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롯데에서 뛰었다. 임준섭과 이학주는 2024년에 롯데 소속이었다.
덕산 문종(등록명 홍문종)은 1984년부터 1988년까지, 국촌 덕용(등록명 박덕용)은 1984년에 롯데에서 뛰었다. 가네이 마사유키(등록명 김정행)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롯데 소속이었으며, 1986년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가나자와 노부히코(등록명 김병수)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금산 행희(등록명 김행희)는 1992년에 롯데에서 뛰었다. 홍야 준키(등록명 홍순기)는 1994년에 롯데 소속이었다.
데릭 화이트는 2000년, 오지 캔세코는 2001년에 롯데에서 뛰었지만, 1군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모리 카즈마는 2003년 롯데의 첫 일본인 선수(재일 한국인 제외)였지만, 시즌 전 해고되었다. 광산 영화(등록명 김영화)와 보이 로드리게스는 2003년에 롯데에서 뛰었다. 로베르토 페레스는 2003년부터 2005년, 2007년에 롯데에서 활약했다. 아마노 유타카(등록명 김용강)는 2006년에 롯데에서 뛰었지만, 1군 경기 출전은 없었다.
카림 가르시아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롯데에서 활약하며 2008년 타점왕을 차지했다. 브라이언 코리와 크리스 부체크는 2011년에 롯데에서 뛰었다. 크리스 옥스프링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루이스 히메네스는 2014년에 롯데 소속이었다. 글렌 스파크먼은 2022년, 안다 권수(등록명 안권수)는 2023년에 롯데에서 뛰었다. 애런 윌커슨은 2023년부터 2024년까지 롯데 소속이다.
토이 쇼스케(土居章助)(등록명 도위창)는 1984-1987, 1990-1992년에 롯데 코치였다. 후쿠시 케이쇼(福士敬章)(등록명 장명부)는 1990년, 코가 마사아키(古賀正明)는 1992년, 이시이 타케히로(石井丈裕)는 2003년, 야나기다 세이진(柳田聖人)은 2006년에 롯데 코치를 역임했다. 카츠자키 코세이(勝崎耕世)는 2012년, 혼니시 아츠히로(本西厚博)는 2014-2015년, 크리스 옥스프링(クリス・オクスプリング)은 2016-2018년, 후리오 프랑코(フリオ・フランコ)는 2016-2020년, 브랜든 맨(ブランドン・マン)은 2021년에 롯데 코치였다.
5. 4. 역대 외국인 선수
롯데 자이언츠에는 여러 외국인 선수들이 거쳐갔다. 1984년에는 덕산 문종(등록명 홍문종)과 국촌 덕용(등록명 박덕용)이 입단했다. 국촌 덕용은 1승 2패, 평균자책점 5.04의 성적을 남기고 1년 만에 팀을 떠났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가네이 마사유키(등록명 김정행)가 활약했으며, 1986년에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는 가나자와 노부히코(등록명 김병수)가 뛰었다. 1992년에는 금산 행희(등록명 김행희)가 선수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홍야 준키(등록명 홍순기)가 롯데 자이언츠에 합류했다.2000년에는 데릭 화이트가, 2001년에는 오지 캔세코가 롯데 유니폼을 입었지만, 오지 캔세코는 1군 공식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해고되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이대호가 롯데에서 활약했고, 2017년 복귀했다. 2003년에는 모리 카즈마와 광산 영화(등록명 김영화), 보이 로드리게스가 롯데 선수로 뛰었다. 모리 카즈마는 구단 최초의 일본인 선수(재일 한국인 제외)였으나, 시즌 개막 전에 해고되었다. 로베르토 페레스는 2003년부터 2005년, 그리고 2007년에 롯데에서 활약했다.
2006년에는 아마노 유타카(등록명 김용강)가 롯데에 입단했지만, 1군 경기 출전 없이 1년 만에 해고되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카림 가르시아가 롯데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2008년 타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브라이언 코리와 크리스 부체크가 롯데 선수로 뛰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크리스 옥스프링이 활약했다. 2014년에는 루이스 히메네스가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2022년에는 글렌 스파크먼이, 2023년부터는 안다 권수(등록명 안권수)와 애런 윌커슨이 롯데 선수로 뛰고 있다.
코치진 중에서는 토이 쇼스케(土居章助)(등록명 도위창)가 1984년부터 1987년,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재직했다. 후쿠시 케이쇼(福士敬章)(등록명 장명부)는 1990년에, 코가 마사아키(古賀正明)는 1992년에 롯데 코치로 활동했다. 이시이 타케히로(石井丈裕)는 2003년에, 야나기다 세이진(柳田聖人)은 2006년에 롯데 코치진에 합류했다. 카츠자키 코세이(勝崎耕世)는 2012년에 트레이닝 코치로 재직했다. 혼니시 아츠히로(本西厚博)는 2014년부터 2015년까지, 크리스 옥스프링(クリス・オクスプリング)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롯데 코치로 활동했다. 후리오 프랑코(フリオ・フランコ)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브랜든 맨(ブランドン・マン)은 2021년에 롯데 코치진에 이름을 올렸다.
6. 영구 결번
롯데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은 두 개가 지정되어 있다.
- 11번: 롯데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데 일등 공신이자 한국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였던 최동원의 등 번호이다. 최동원은 1984년 KBO MVP를 수상했다.[1] 이 번호는 2011년 9월 30일에 롯데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사직야구장 왼쪽 외야 담장 상단에 걸렸다. 최동원은 2011년에 암으로 사망했다.[1]
최동원 P |
7. 기타
롯데 자이언츠는 2014년부터 LG 트윈스를 최종전에서 여러 차례 만나 승리한 적이 있다. 2014년에는 LG 트윈스의 2014년 KBO 포스트시즌 진출을 무산시켰지만, 같은 시간 넥센 히어로즈가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큰 의미는 없었다. 2017년에는 롯데 자이언츠가 이미 2017년 KBO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한 상태에서 최종전에서 LG 트윈스를 4:2로 꺾고 3위를 확정지었다. 2021년에는 롯데 자이언츠는 탈락이 확정된 상태였지만, LG 트윈스를 4:2로 이기면서 LG 트윈스의 2위 진입 가능성을 좌절시켰다. 하지만, KT 위즈와 삼성 라이온즈가 모두 승리하면서 LG 트윈스는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날짜 | 원정 팀 | 득점 | 홈 팀 | 장소 | 결과 |
---|---|---|---|---|---|
2014년 10월 17일 | LG | 5:8 | 롯데 자이언츠 | 사직 | 롯데 자이언츠의 승리 |
2017년 10월 3일 | LG | 2:4 | 롯데 자이언츠 | 사직 | 롯데 자이언츠의 승리로 3위 달성. |
2021년 10월 30일 | LG | 2:4 | 롯데 자이언츠 | 사직 | 롯데 자이언츠의 승리 |
일본의 지바 롯데 마린즈와는 사회인 야구단 시절부터 자매 구단으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과 같은 디자인의 유니폼을 착용했고, 일본 측이 유니폼을 변경하면 2, 3년 후에 한국도 그 디자인을 받아들였다. 롯데 오리온즈의 유니폼과 유사한 올드 유니폼은 1982년부터 1995년까지 착용했으며, 2023년 현재도 이 올드 유니폼을 착용하고 경기에 출전하거나 팬들이 착용하는 경우가 있다.
정기적으로 일본 측과 선수 및 스태프 교류를 하고 있으며, 롯데 자이언츠 선수가 일본 구단의 캠프나 연습에 참가하기도 한다. 사회인 야구단 시절부터 오리온즈 코치를 역임한 토이 쇼우스케(土居章介)는 코칭 스태프로서 공헌했으며, 1990년에는 감독 대행으로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팀을 지휘한 외국인 코칭 스태프로 기록되었다. 이시이 다케히로(石井丈裕), 야나기다 마사토(柳田聖人), 카츠사키 코세이(勝崎耕世), 혼니시 아쓰히로(本西厚博) 등 일본인 지도자들이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2016년에는 일본 만화 도라에몽과의 협업으로 도라에몽 그림이 들어간 한정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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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롯데 자이언츠, 유니세프 공식 후원
(출처 불명) # 출처를 명시할 수 없습니다.
2011 # 후원 시작 년도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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